"성찰 그리고 우리가 가야할 길"에 대한 반론 ①

김창현 진보대통합연대회의 부대표가 <현장언론 민플러스>에 기고한 "성찰 그리고 우리가 가야할 길" 연재에 대해 윤현식 전 노동당 정책위의장이 반론을 보내왔다. 아래는 반론을 개진하게 된 배경과 연재의 방향에 대한 필자의 서문과 1편 본문으로 이어진다. [편집자 주]

 

반성과 평가, 그리고 이를 통한 성찰. 새로운 이를 시작할 때 선행되어야 할 일임은 분명하다. 계승의 지점과 극복의 지점이 명확해질 때 새로움의 진면목이 드러날 터이다. 반성과 평가가 잘못되거나 왜곡된다면, 성찰은 불가능하고 구태와 새로움은 뒤엉킨다.

김 부대표가 8월 한 달 동안 <현장언론 민플러스>에 기고한 “성찰 그리고 우리가 가야할 길”이라는 연재가 있었다. 본인의 말처럼 “주체혁신의 관점”에서 이러한 성찰을 시도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그 성찰이 운동적 차원의 실천노선으로 전환되지 못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하에서는 김 부대표의 글 개제 순서에 따라 ‘노동중심성, 당내 민주주의와 패권주의, 의회주의와 합법주의’를 주제로 논의하고자 한다. 원 글에 대한 분석과 비판이 주를 이룰 것이나,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의미의 반성과 평가, 성찰과 전망이 제출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 서문]

김창현 진보대통합연대회의 부대표(이하 김 부대표)의 첫 글의 주제는 ‘노동중심성’이다. 이 글은 두 가지 측면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그가 ‘노동중심성’이 과연 제대로 설정하고 있는지이다. 다른 하나는 민주노총에 대한 그의 입장이다.

김 부대표의 논리전개는 이렇다. 기존 진보정당은 ‘노동중심성’을 세우는 데 실패했다. ‘노동중심성’을 강령적 차원에서 채택하는 새로운 정당이 필요하다. 그 정당은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건설되어야 한다.

그러나 김 부대표가 개제한 글의 문제는 바로 그 ‘노동중심성’의 개념에서부터 비롯한다. 미리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김 부대표의 글에서 ‘노동중심성’의 진의는 혼란 속에서 헤매고 있고, 민주노총에 대한 구애는 지나치게 애절하다.

기존 진보정당이 ‘노동중심성’을 제대로 담보하지 못했다는 김 부대표의 지적은 정확하다. 그런데 정작 기존 진보정당의 문제는 바로 ‘노동중심성’에 대한 오해와 착각이었다. 기존 진보정당의 노동정치 실패의 원인은 다름 아니라 ‘노동중심성’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였던 것이다. 김 부대표가 말하는 ‘노동중심성’이 조직논리 이외에 정당정치의 핵심이어야 할 실천적 의미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 사진출처: 민주노총

철지난 ‘계급정당 vs 대중정당’ 구도의 반복

김 부대표가 말하는 진보정당의 ‘노동중심성’은 이렇다.

노동계급의 가치와 원칙을 진보정당의 가치와 원칙의 중심에 놓는 것, 진보정당에서 노동계급의 헤게모니를 보장하는 것, 노동계급을 진보운동의 지도계급으로 묶어세우는 것을 당활동의 최우선 목표로 삼는 것

김 부대표는 해당 글에서 ‘계급정당’에 대해서는 단호한 어조로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그가 바라는 진보정당의 모습은 “노동중심성이 분명한 대중적 진보정당”이다. 하지만 저 논리에 따르면 이 정당은 노동계급의 정당이다.

사실 계급정당이냐 대중정당이냐를 가지고 따지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다. 대중정당이라고 할 때 그 ‘대중’은 두 가지 함의를 가진다.

첫째, 자기 기반이 되는 ‘대중’이다. 정당은 바로 자신들의 정치활동을 뒷받침해 줄 자기 ‘대중’을 가져야 한다. 그 ‘대중’이 노동계급이면 그 자체가 노동계급 정당이다. 새누리당이 아무리 자신들을 탈 이념적 정당이라고 한들, 그들은 자본가와 기득권세력이라는 대중을 등에 업고 있다. 새누리당이야말로 남한 사회에서 가장 강고한 자기 대중을 가진 대중정당이자 계급정당이다.

둘째, 정치적 영향력을 확산시키고자 하는 대상으로서 ‘대중’, 즉 사전적 의미로서의 대중이다. 지하혁명정당을 자청하지 않는 한, 정당은 대중친화적일 수밖에 없고, 대중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얻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제아무리 진보정당이라고 한들, 자기 정체성을 지키면서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원칙과 개량 사이에서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보수정당도 마찬가지다. 더민주당조차도 진보적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알량하게나마 진보적 의제와 정책들을 자신들의 것으로 수용하려는 척이라도 한다.

조직 논리만 남은 ‘노동중심성’

진보좌파진영에서 아직도 계급정당이냐 대중정당이냐를 따지는 것은 실질적으로 무용하다. 그러나 김 부대표는 아직도 이러한 혼란을 정리하지 못한 채, 계급정당과 대중정당을 나누다가 결국 계급정당의 조직체계로 돌아간다. 그가 위 인용문에 연이어서 제시하고 있는 ‘진보정당의 첫 조직전략’을 보자.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조합의 혈연적 결합, 현장위원회·현장분회 등 노동자들의 당 정치조직생활과 현장정치활동, 당의 의사결정과 운영에서 노동계급의 주체성·주도성 보장, 당의 노동조합에 대한 정치적 지도의 보장 등

이러한 조직을 구성하기 위해 전제되는 것이 바로 ‘노동중심성’이다. 그런데 김 부대표의 글 어디를 보더라도 노동중심성에 관한 논의는 오로지 조직론만이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그 결과 김 부대표의 ‘노동중심성’은 얼핏 대공장 조직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는 조직구조를 연상시킨다. 특히 총선 당시 울산에서 거둔 성과와 연결할 때 그러한 연상은 설득력을 얻는다. 허나 조직론만으로 ‘노동중심성’을 사고하는 것은 오류다. 더구나 정당의 강령적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할 ‘노동중심성’은 단지 조직구성의 형태를 논하는 것만으로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

진보정당이 갖추어야 할 ‘노동중심성’은 ‘노동’이라는 열쇠로 세계를 분석하고 현상에 대응할 것을 요구한다. ‘노동’이라는 열쇠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젠더, 소수자, 생태, 평화를 해석해야 하고, ‘노동’이라는 열쇠로 국가와 세계를 응시해야 한다. 모든 형태의 임노동자와 영세자영업자, 농민, 어민, 수렵인 등 실제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노동의 관점에서 여성의 문제, 성소수자의 문제, 장애인의 문제, 녹색·생태의 문제, 북한 문제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 바로 진보정당의 ‘노동중심성’이다. 녹색당이 ‘녹색’이라는 열쇠말로 세계를 분석하고 현상에 대응하는 것을 생각해보라.

▲ 지난 8월 22~23일 개최된 민주노총 정책대의원대회

‘노동’이라는 열쇠로 세상의 문을 여는 것, ‘노동중심성’

김 부대표가 말하는 “노동계급의 가치와 원칙”이 ‘노동중심성’이 되기 위해서는 이처럼 진보정당이 가져야 할 ‘노동중심성’의 원칙부터 밝혀져야 한다. 노동계급은 바로 이 ‘노동중심성’을 계급적 가치와 원칙으로 받아 안고 이를 현실화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노동중심성’을 가지는 진보정당의 조직론은 단지 노동자가 당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당의 의사결정과 운영에서 노동계급의 주체성·주도성이 보장되는 형태를 뛰어 넘어야 한다.

따라서 ‘노동중심성’을 갖춘 진보정당의 표징을 노동자가 당을 장악하고 있는지 여부로 파악한다는 것은 단편적 발상이다. 자칫 김 부대표가 제시하는 조직론에 따라 당의 중심에 서게 된 노동자가 자기 현장조직의 이해를 당의 이름으로 관철하려는 경우, 노동 이외의 부문과 주체들은 배제된다. 당의 중심에 선 노동자가 ‘노동중심성’에 대한 이해를 자기편의적 내지 조합주의적으로 판단하게 될 경우, 이것은 ‘노동중심성’이 아니라 ‘조직 노동자 중심성’에 불과하며 또 다른 형태의 패권이다.

김 부대표가 과거 자신의 진보정당 활동을 돌이켜보면서 제기하는 문제들은 의미가 있다. 현장정치가 소멸하고, 정치소조로서 현장 내 당 조직이 구축되지 못했으며, 의원들이 현장정치에 등한시하는 의정활동을 했다는 등의 비판은 앞으로도 견제해야 할 숙제로 남는다. 김 부대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간다.

당이 노동자 대오를 성장시키는 역할을 포기한 결과 … 노동자들은 늘 동원대상이 되었고 현장은 어느 순간부터 당의 거점이 아닌 세액공제 대상으로 전락 … 전체 진보운동에 복무하는 의회전술이 아니라 의회진출과 그 활동에 어떻게 노동운동을 비롯한 진보운동을 동원할 것인가에 관심이 집중

왜 이렇게 되었는가에 대해 김 부대표는 이렇게 진단한다.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에 안주하며 노조의 비위를 맞추는데 급급했기 때문이었다. 표와 돈을 만들어내는 노조에 어찌 쓴 소리를 한단 말인가? 조금 심하게 말하면 당의 합법주의 · 선거주의와 노조의 조합주의가 결탁하여 점차 노동대중을 소외시켜 간 것

그 결과 노동자들은 “몸 대주고 돈 대주는” 셔틀로 전락했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과거의 문제점들을 극복하고 진보정당은 계급적 토대를 튼튼히 해야 할 것을 주장한다. “진보정당이 노동계급 등 기층 민중을 진보운동의 주체로 묶어세우는 데에 주력하지 않고 상층 중심의 의회진출을 조급하게 추구할 경우 지배세력의 탄압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고 그는 말한다.

다름 속 같음

논리 자체의 인과관계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지만 이에 대해선 다음 기회에 논의하기로 하자. 정작 당황스러운 것은 이러한 문제들을 넘어서는 대안으로 “민주노총이 주체가 되는 당 건설”을 선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갑작스러운 논지전개는 당혹스럽다.

물론 그는 “계급적 토대를 튼튼히 하는 문제”로서 민주노총이 주체가 되는 정당 건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노동중심성’을 스스로의 가치와 원칙으로 삼고 있지 않고 있다면, 민주노총이 주체가 되는 정당이라고 해서 “계급적 토대를 튼튼히” 갖춘 정당이라고 볼 여지는 없다.

민주노총이 새로운 진보정치세력을 구성하고 ‘노동중심성’을 가진 진보정당의 건설을 위해 중요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다. 하지만 앞서 본 것처럼, ‘노동중심성’이 단지 노동자가 주축이 된 당 조직을 만들어내는 것에 국한된다면 이 선언은 그저 민주노총이 진보정당건설에 “몸 대고 돈 대”야 한다는 결론을 에둘러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김 부대표가 ‘노동중심성’을 가진 진보정당을 조직론 차원에서만 설명하다보니, 민주노총이 주체가 되는 당 건설의 당위성은 단지 “같은 편끼리 싸우지 말고 하나가 될 것”을 강조하는 선에서 마무리되고 만다. 울산에서 치러진 총선을 예로 들면서 그는 현장노동자의 말을 빌려 “같은 편끼리 싸우지 말고 하나가 될 것”을 강조한다. 이 표현을 보면서 다시금 과거의 패권주의가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웠던 '큰 단결' 또는 '구동존이(求同存異)'의 망령이 어른거리는 느낌을 받는 것은 그저 피해의식 때문만은 아니다.

지금 노동자들에게 정치세력이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설명해야 할 것은, 갈라져 있는 이 상황에 대한 의미여야 한다. 왜 갈라졌는가? 뭐가 다른가? 어떻게 다른가? 함께 할 수 있는 지점과 함께 할 수 없는 지점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가? 노동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 설명을 요구한다. 단순히 현장의 노동자들이 일치단결하여 '같은 편끼리 싸우지 말고 하나가 될 것'을 진보세력에게 요구한다고 주장하는 건 왜곡일 뿐만 아니라 현장 노동자들에 대한 심한 결례이다.

예컨대 김 부대표와 나는 같은 편인가? 그와 내가 서 있는 위치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아주 많은 측면에서 우리는 서로 차이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한사회 계급모순에 대한 판단, 한반도의 비핵화에 대한 내용 등의 차이가 분명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반대로 어떤 면에서는 같은 견해와 이해를 가지고 있는 부분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차이와 같음이 무엇인지를 그동안 제대로 드러내고 확인해 본 적이 없다. 그러다보니 노동자 민중에게 우리의 입장차이가 무엇인지 설명할 기회도 만들지 못했다. 현장 노동자들에게 사과하고 설명해야 할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 지난 8월18일 민주노총인천본부가 주최한 정치전략 토론회가 진행되고 있다.

진정한 ‘민주노총당’을 바란다면

김 부대표의 정치이력으로 미루어 볼 때, 이러한 측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성급하게 ‘기승전민주노총’으로 진보정당 건설논의를 이끌어간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면 본인 스스로 계급정당을 부정하면서도 계급정당의 조직체계를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이 조직체계는 민주노총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설명하고, 이것이 바로 노동중심성이라고 정리하는 분열적 논리전개를 강행하는 이유는 뭔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민주노총을 붙들어 안기 위해서이다. 다시금 제도권 정당조직을 구성하기 위한 노력이 빠른 시간 안에 제 성과를 달성하기 위해 김 부대표에게 민주노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조직과 재정과 힘을 가지고 있는 민주노총이라는 '몸 대주고 돈 대주는' 원천에 대한 욕망이다. 결국 이 논리는 민주노총의 역할을 여전히 제한된 형태로 '묶어세우는' 구조에 지나지 않는다.

김 부대표는 논의의 서두에서 ‘민주노총당’이라는 말이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는 현실을 지적했다. 이 지적에 동의하는데, ‘민주노총당’이라는 말은 ‘종북’이라는 말만큼이나 왜곡되고 저열한 인식을 조장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노동중심성’이 강령적 차원에서 채택되는 진보정당이라면 ‘민주노총당’이라는 말이 자랑스러워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오해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다시 강조하지만 민주노총은 ‘노동중심성’을 가진 정당을 만드는 과정에서 지대한 역할을 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그 정당이 ‘민주노총당’임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대의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진보정당의 ‘노동중심성’을 단순하게 조직론 차원에서 설정하는 오류의 극복이다. 물론 정치적 영향력의 최종 판정은 세력의 규모와 힘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민주노총의 저력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김 부대표가 제시하는 조직론 차원의 ‘노동중심성’은 민주노총을 새로운 진보정당의 구심점으로 세우기보다는 이전 시기 진보정당이 저질렀던 오류의 반복에 민주노총을 끌어들이는 것으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새로운 진보정당의 큰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면, 조급한 마음에서 민주노총에게 결단을 요구할 일이 아니다. 일부 그룹이 말하는 진보정치의 다원성 운운하는 논리는 차치하자. 민주노총이 단일한 대오를 구성하여 힘 있는 정치세력으로서 새로운 진보정당의 주체가 되기를 바란다면, 먼저 ‘노동중심성’의 원칙을 민주노총과 함께 확인하고 합의해야 한다. 동시에 제 진보세력의 화해와 신뢰회복을 추구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민주노총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 것이 우선이다.

 

윤현식

전) 민주노동당 정책위원

전) 노동당 정책위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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