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PTPP 가입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출범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을 반대하는 국민 저항이 거세질 전망이다. 농업, 노동, 먹거리, 소비자, 인권, 정당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CPTPP 가입 저지를 위해 공동행동을 시작한다고 선언했다.

CPTPP는 일본과 호주·캐나다·뉴질랜드·베트남 등 아시아태평양지역 11개국이 참여한 다자간 무역협정이다. CPTPP 개방 수준은 농축산물 96.3%, 수산물은 100% 관세 철폐로 ‘전면 개방’ 수준이다.

▲ 사진 : 뉴시스
▲ 사진 : 뉴시스

문재인 정부가 임기 말 추진하려 했던 CPTPP 가입 신청이 윤석열 정부로 넘어왔고, 윤 정부는 110대 국정과제를 발표하며 CPTPP 가입 추진 의사를 밝혔다.

이들 단체들은 12일 오전 서울 종로 서울글로벌센터 국제회의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CPTPP 가입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발족을 알리고, “농축수산업 포기, 식량주권 포기, 검역주권 포기, 국민건강권 훼손하는 CPTPP 가입이 졸속적이고 밀실협상으로 추진되고 있다”면서 “이를 저지하기 위한 행동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먼저 박석운 민중공동행동 공동대표가 운동본부 발족의미에 대해 말했다. 박 공동대표는 “CPTPP 가입을 위한 절차를 밟으며 통상절차법에 따라 산업별영향평가를 했는데 그 결과가 종이 한 장뿐이었다. 엄청난 통상협정을 하면서 정부 당국도 CPTPP에 왜 가입해야 하는지 속 시원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무모하고 졸속적인 협상이 아닐 수 없다”고 비판한데 이어, “농축어민들을 비롯해 직접적인 피해자가 될 국민들의 동의가 있어야 가입할 수 있다는 걸 분명히 하며, 가입 저지를 위한 범국민운동을 펼치겠다”고 밝혔다.

“협상은 필요없다, 가입 ‘저지’가 목표”

농·어민 단체 대표들도 참석해 CPTPP 가입에 대한 분노를 토했다.

전국농민회총연맹 하원오 의장은 “우린 CPTPP ‘저지’가 목적이다. ‘협상’은 필요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그는 “지난 30년간 신자유주의 FTA를 체결하면서 농업만은 지키겠다고 했지만 CPTPP 앞에 붙은 ‘CP’라는 단어처럼 점진적으로, 포괄적으로 농업은 하나씩 무너져 왔다”면서 CPTPP 가입도 예외가 아닐 것이라고 했다.

기존 FTA보다 높은 수준의 개방을 요구하는 CPTPP에 가입하기 위해선 기존 가입국인 11개 국가 모두의 승인을 얻어야 하는데, 이 말은 이들 국가의 요구 조건을 수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쌀 수입 개방에 대한 요구를 막지 못할 수 있다. 일본이 가입 당시 쌀 관세를 유지하기 위한 조건으로 호주에 무관세 쿼터 8400톤을 제공한 선례가 있다.

전국연안어업인연합회 김종식 회장은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고 있는 어업인들에게 CPTPP 가입은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라고 했다. CPTPP 협정문은 ‘수산보조금 지급을 규제’하는 방안을 담고 있고, “밀려오는 수입 수산물로 인해 생업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 뻔하다”는 것이다.

▲ 12일 서울 종로구 글로벌센터에서 열린 CPTPP 가입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발족 기자회견.
▲ 12일 서울 종로구 글로벌센터에서 열린 CPTPP 가입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발족 기자회견.

수입 수산물은 국민의 건강권까지 위협한다는 비판도 이어졌다. CPTPP 의장국인 일본은 CPTPP 가입 의사를 밝힌 대만에게 방사능 오염의 영향이 남아 있는 후쿠시마산 농수산물 수입을 요구했고 대만은 이를 받아들여야 했다. ‘가입국 만장일치’라는 가입조건을 악용해 일본이 우리에게도 후쿠시마산 농수산물의 수입 재개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 때문이다.

전국먹거리연대 조완석 상임대표는 “우리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것은 국가의 의무다. 일본 후쿠시마산 식품 수입 재개는 국민 건강권을 불안하게 만든다”고 꼬집은 데 이어 “CPTPP 국가 간 수입 검역 규정 완화 역시 이를 부추긴다”고 덧붙였다.

CPTPP의 동식물 위생·검역(SPS) 규정은 검역 장벽을 대폭 낮추게 만든다. 그동안 동식물 전염병이 발생한 ‘국가’에 대해 수출입을 제한해 오던 것을 ‘국가’가 아닌 ‘구획(농장)’으로 규정하면서, 가축에 질병이 걸리거나 식물에 병해충이 발생한 ‘농장’이 아니라면 그 국가에서 수입되어 오는 것은 막을 수 없게 된다.

조 상임대표는 “먹거리 위기와 농업 위기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면서 ‘식량주권 확보’도 강조했다. 그는 “코로나 팬데믹 위기에서 식량 수출국의 통제를 통해 우리는 식량주권 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 느꼈다”면서 “우리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때만 국민 먹거리 보장이 가능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며, 무역시장 개방이 아닌 식량자급률 확대로 농어민의 삶을 보호하고 우리사회 먹거리 취약계층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먹거리 정책의 공공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4년 전, 범국민 행동을 다시 한번

범국민운동본부에 이름을 올린 각계각층에서 CPTPP 가입 저지를 위해 앞장서겠다는 결심이 이어졌다.

김은형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기후위기로 인해 산업전환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CPTPP가 노동자 생존에, 노동환경에, 경제산업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정부는 어떤 대응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면서 “노동자들도 CPTPP 가입 저지 투쟁에 함께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국쌀생산자협회 김명기 회장은 “정부가 국민을 보호할 줄 알아야 하는데 오히려 국민의 먹거리를 해치려고 하고 있다. 정권만 잡고 휘두르면 되는 줄 아는 이들에게 운동본부가 CPTPP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자”고 했고, 친환경무상급식풀뿌리연대 김홍배 공동대표는 “농업인, 노동자 생존권을 위협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라나는 어린이와 국민 모두의 건강권을 위협하는 CPTPP 저지를 위해 투쟁하는 것은 물론, 학교급식법에 우리 농산물 사용 의무화 등 법 개정에도 적극적으로 앞장서겠다”고 힘을 보탰다.

진보정당에선 김재연 진보당 상임대표가 참석했다. 김 상임대표는 “‘CPTPP’가 낯설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이미 14년 전, 이명박 정부 출범 100일이 안 돼 한미FTA 체결을 앞두고 전 국민 행동, 대정부 투쟁을 만들어낸 경험이 있다”면서 “모든 진보정당, 상식을 갖고 있는 건강한 야당과 함께 연대해 CPTPP를 막아낼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운동본부 발족과 함께 “농축수산업과 식량주권, 검역주권, 국민건강권”을 지키기 위한 CPTPP 가입 저지 범국민 투쟁이 본격 시작됐다. 범국민운동본부에 가입한 단체는 발족식 현재 101개다. 지역별 운동본부도 꾸려질 예정에 있다. 

운동본부는 출범과 동시에 CPTPP 가입 저지 범국민 서명운동을 시작하는 한편, 5월 말~6월 초 지역별 저지 행동에 이어 7월12일엔 범국민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CPTPP 국민토론회(6.13)를 비롯해 민주당과 국회 해당 상임위 면담 등 국회를 압박하는 사업도 계획하고 있다.

경제동맹을 넘은 한미일 군사동맹

김재연 상임대표의 말대로 윤석열 정부 출범과 함께 거대한 무역협정 가입을 앞두고 14년 만에 범국민 저항이 일어날 참이다. 그러나 CPTPP 가입 저지 투쟁은 무역협정 저지 투쟁에 머물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CPTPP 가입을 둘러싸고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나라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본 기시다 총리는 오는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압승해 전쟁과 무력 행사를 영구히 포기하고 전력을 보유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일본 평화헌법(9조)을 개정, 사실상의 군대인 자위대의 존재를 헌법에 담겠다는 뜻을 품어왔다. 헌법을 개정해 군사대국을 꿈꾸는 일본은 한일관계를 동시에 풀기 위해 CPTPP 의장국 지위를 활용해 한국의 CPTPP 가입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후쿠시마산 수산물 수입 제한 조치 해제를 넘어 강제동원과 일본군‘위안부’합의 등을 문제 삼을 가능성도 크다.

일본과 신뢰 회복을 토대로 미래협력관계를 구축한다는 방침을 세운 윤석열 정부가 어떤 입장을 취할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CPTPP를 아시아태평양지역 경제 통합의 문제로만 볼 수 없는 이유는 또 있다.

CPTPP의 전신인 TPP는 2015년 미국이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확장 중이었던 중국을 견제하고, 환태평양 국가 간 경제 협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일본과 함께 주도해 출범한 협정이다. 그러나 2017년, 보호무역주의를 주창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며 미국은 TPP에서 탈퇴했다. 이후 일본이 주도해 CPTPP가 출범한다. 그리고 미국이 CPTPP 복귀에 유보적인 사이 중국이 지난해 9월 CPTPP 가입을 신청했다.

중국은 미국이 대중국 포위를 위한 신냉전을 추구하며 경제적 압박을 가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2022년 1월 한중일을 중심으로 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까지 발족하며 인도태평양지역에서 경제적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반면 미국은 이 지역에서 주도권을 상실할 것을 우려해 새로운 인도태평양지역 경제 틀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 출범을 주도하며 한국을 비롯해 일본, 호주 등의 참여를 논의하고 있다. 중국과의 패권경쟁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IPEF 역시 역내 동맹과 우방국들을 모아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려는 대중국 포위망의 일환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목소리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은 “TPP의 각국 협상이 10년 정도 시간이 걸린 것을 감안했을 때 미국은 그 사이 CPTPP도 잘 활용하려고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본이 주도하는 CPTPP에 한국은 가입하고 중국 가입은 반대를 예견해 볼 수도 있다.

CPTPP 가입도, IPEF 가입도 결국 미국의 대중국 포위망을 확대하기 위한 한미일동맹 강화로 활용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한미일 안보동맹 확장은 일본 군사화의 길을 더욱 쉽게 열어줄 수도 있다.

오는 20일부터 한국과 일본을 방문하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1일 윤석열 대통령과 한미정상회담을 갖고, 22~24일 일본을 방문한다. 한미일 정상이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에 따라 광우병 촛불을 들었던 민중들의 저항의 파고가 달라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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