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기 농민 쾌유를 염원하며 임봉재 선생님 인터뷰

지난 해 11월 14일 민중총궐기에 참가했다가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9개월 넘도록 의식불명상태에 있는 백남기농민의 청문회가 지난 12일 국회에서 열렸다. 그러나 경찰 증인들의 답변 회피와 질문 요지와 어긋나는 답변은 온 국민을 실망시켰다. 현장언론 민플러스는 백남기 농민의 쾌유를 기원하고 국가폭력에 대한 제대로 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백농민과 평소 친분이 있는 전 가톨릭농민회장인 임봉재선생의 인터뷰를 게재한다.  

- 백남기 농민과는 어떻게 알고 지내셨는지요.

"내가 가톨릭농민회(이하 가농)에서 활동가(여성부장)로 일할 때였어요. 정확한 연도는 기억할 수 없지만 백 형제(백남기 농민)가 가농 회원가입 연도를 보니 1986년이었죠. 가농 전국 입회자 교육 때 처음 만났고, 내가 여성농민 활동(교육, 조직)을 담당하고 있었기에 백 형제 부인 박경옥 여성농민을 만나러 방문하면서 백남기 형제와도 자주 만나게 됐어요."

- 백남기 농민을 한마디 표현한다면 어떤 분인가요?

"한 마디로 표현은 어렵네요. 백남기형제는 삶이 운동이었고, 운동을 삶 속에 녹여내고 실천하며 사는 ‘생명 지킴이’이라고 할 수 있지요."

 

- 백남기 농민의 농사에 대한 평소 소신은 무엇이었나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람이 아니라 돈을 섬기고 모시고 따르는 이 시대에, 농업을 돈으로 보지 않고, 농업의 생명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삶의 바탕을 생명농업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지요. 직접 벼농사, 밀농사, 고추농사, 콩농사 등을 지어 메주를 쑤고 된장을 만들어 소비자(가농 우리농촌살리기) 회원들과 가진 것을 나누며 사는 사람이지요."

 

- 이웃 농민들 또는 마을 사람들, 지인들에게 백남기 농민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백 형제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는 구체적으로 얘기해 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네요. 다만 내가 본 백남기 형제는 배려심 많고 지역 후배들에겐 듬직한 맏형 같은 사람. 그러나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권하고 밀어 붙이면 자신이 맡은 역할에 있어서는 책임을 다해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 백 농민은 학생운동 출신 농민운동 ‘투신 1세대“라고 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3~40대 ’청년 농민 백남기‘로 혹 기억하고 계신 게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80년대 중반에 내가 본 백남기 형제의 첫 인상은 차돌처럼 강직하고 불의에 있어서는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대쪽 같은 성품을 지녔으면서도 해맑은 영혼의 소유자, 장난기 어린 소년 같은 모습이었어요. 70~80년대, 모두가 외면하고 떠나는 농촌에 돌아와서 ‘농업이 안전해야 나라가 평화롭고 그런 나라에 사는 국민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그래서 우리 아들·딸들이 평화롭게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농업을 천직으로 알고 살았지요.

그런 마음으로 최루탄도 불사하고 감옥도 마다않고 오로지 이 갈라진 나라의 하나 됨과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불의와 맞서가며, 인건비는 고사하고 씨앗 값도 못 건지는 농사를 나이가 칠순이 다 될 때까지 농사꾼으로 살았지요. 일찍이 홀로 된 아버님을 모시고 한 여인의 남편이자 삼남매의 존경받는 아버지로 살면서 자녀들의 이름도 ‘백도라지, 백두산, 백민주화’로 지어 준 것으로도 우리는 그의 나라사랑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합니다."

 

- 백남기 농민이 짓는 작물은 주로 어떤 것이었나요?

"벼, 콩, 고추, 밀 등이 주 작물이고 그 외 식구들과 함께 먹을거리들을 심어서 먹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 백남기 농민의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땠나요?

"글쎄~ 첫 인상은 딱딱하고 차가운 사람처럼 느껴지지만 알고 보면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나 사람을 존중하고 즐겁게 해 주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지요. 예를 들면 농담을 진담처럼 하는 사람, “남자는 하늘이요 여자는 땅바닥”이라는 말을 해서 처음엔 무척 당황했는데 알고 보니 우리 사회의 보수적이고 여성 무시하는 것을 꼬집어 농담으로 하는 것이었어요.

부인에게도 말을 높이고 존중하는 진실된 모습을 여러 번 느끼고 보았지요. 남에게 보이기 위한 제스추어가 아니라 살가운 정이 묻어나는 사람. 이웃이나 남의 불행을 보고 지나치지 않고, 궂은일도 말없이 앞서 하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공자이면서도 “살아남은 사람은 말이 없다”며 끝내 보상을 거부 했다고 들었어요."

 

- 물대포 사고가 발생했던 민중총궐기 참석을 위해 사전 논의가 있었나요?

"큰 집회나 행사가 있을 때는 지역마다 사전 논의를 하기 때문에 짐작컨대 11.14 민중총궐기 참가 준비를 했을 겁니다."

 

- 백남기 농민의 생활이나 농민운동에서 특징이 있다면요 말씀해주세요.

"본인이 앞에 나서서 하기 보다는 주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하도록 주선하고 뒤에서 밀어주는 성격, 그러나 일을 맡으면 자기 책임과 의무를 충실히 하는 사람이었지요."

 

- 민중총궐기라고 하지만 지역의 농촌문제에 대한 현안도 있었을 텐데... 그 현안에 대해 말씀해 주신다면요?

"농민문제 현안이라면 지역에 따라, 생산 작물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민중총궐기는 지역이나 개인의 문제를 넘어 전체 한국 농업, 농민에게 있어 가장 심각한 밥쌀 수입문제, 쌀값폭락문제 등이 주요 현안으로 다루어 졌어요. 분야별로 보면 벼, 고추, 과수, 시설재배농가와 참외, 수박, 딸기, 고추, 파프리카, 등 채소농가, 축산, 화훼 등등 너도 나도 단작 중심으로 대량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어떤 것을 지역 농민문제 현안이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중소농 역시 농민들이 살아남기 위해 단작 중심으로 농업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는데요. 수입농산물이 우리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데다 가격폭락으로 울며 겨자 먹기로 생산을 포기할 수 없는 농민들은 어떤 작물을 재배하든 나아 질 수 없습니다.

기후변화로 농업생산이 힘들어 지고 있는 지금 식량주권을 잃지 않기 위해 지속 가능하게 우리 농업을 지키기 위한 대안 마련이 시급합니다. 초국적 종자 기업에 종속돼 버린 종자문제도 위기를 맞고 있구요."

 

- 백남기 농민이 펼친 농민운동은 어떤 식으로 진행됐나요?

"가농이 80년대 초부터 농업, 농촌, 농민 문제에 대해 고민하며 실천과제로 삼았고 지금도 그것을 실천하려고 회원들이 분회활동을 통해 노력중입니다. 우리사회의 구조악에 맞서 농촌사회 민주화와 생명공동체적 삶의 실현, 생명농업 실천을 위한 교육, 조직 활동 등을 펼치고 있습니다.

백남기 형제도 지역에서 이 같은 활동들을 통해 농업이 살고 농민이 자존심을 지키며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마을, 지역을 만들려는 노력에 온 힘을 다 들였다고 생각합니다. 나 자신의 삶부터 변화해야 한다는 의식과 사명감으로 어렵고 힘든 유기농을 고집하면서 벼, 고추, 콩, 밀 등을 직접 심고 가꾸어 살아있는 먹을거리로 우리농(우리농촌살리기운동) 회원 소비자들에게 된장, 고추장을 담아 얼굴 있는 먹을거리를 나누고 있습니다."

 

-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로 의식을 잃었을 때 지역 농민들의 상황을 말해 주세요.

"그날 멀리서 참가한 농민들이 대부분이어서 그 시각에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타려고 이동을 하고 있었고 나도 경남지역 참가자들과 버스안 고속도로 위에서 한 농민이 물대포를 맞고 쓰러져 병원에 이송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죄송하고 미안하고 마음 아팠는지..., 아마 모든 농민들의 마음이 다 그랬을 겁니다."

 

- 백남기 농민이 노구에도 불구하고 사력을 다해 총궐기에 나선 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우리나라 전체 인구는 늘어나고 있지만 농가인구는 계속해서 비교도 안 될 만큼 줄어들고 있습니다. (1970년 전체 인구 3,224만 명→ 2014년 5,0420만 명, 1970년 농민은 1,442만 명→2014년 275만 명이다.) 이들마저 60세 이상 노인이 대부분이지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도 주택, 도로, 공장 등으로 야금야금 집어 삼켜 농토는 줄어들고 식량재배면적과 식량생산량도 줄어들고, 식량자급도는 땅바닥을 기고 있습니다. (자급율 22%- 쌀을 제외하면 5% 수준)

수입농산물은 점점 늘어 우리나라 먹을거리시장을 잠식하고, 씨앗에서 밥상까지 초국적 기업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어요. 우리 농민들은 이미 내가 심을 씨앗의 선택권을 빼앗긴 지 오래입니다. 씨앗의 지역성이나 생태적 특성을 무시한 채 농업이 생명산업이 아니라 돈 벌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어요.

단일품목 대량생산이 주를 이루면서 생명(종자)다양성이 파괴되고 세계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유전자조작씨앗과 수입농산물이 우리나라 농업과 밥상에까지 장악하고 들어와 우리국민의 건강을 위협하고 자연생태계파괴는 불을 보듯 뻔한 현실입니다. 정부는 한 술 더 떠 밥쌀 수입까지 하고, 모든 물가는 치솟는데 쌀값은 계속해서 바닥을 기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이를 극복하고 막아내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지키고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배려하면서 이웃과 함께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생명공동체운동, 생명농업을 나이 일흔을 넘기면서도 농사일에 손을 놓지 못하고 몸이 움직일 수 있는 날까지 사명감으로, 그래서 지난 해 11월 14일 민중총궐기 전 날까지 밀 씨를 땅에 묻고 서울로 올라 간 이가 백남기 농민입니다."

- 백남기 농민 사태 이후 지역 농민들의 달라진 모습이 있나요?

"농민들은 지금 억울하고 분하고 참을 수 없지만 모두가 살기에 급급한 나머지 일 년 농사를 접을 수 없는 까닭에 심한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백남기 농민 사태를 통해 본 농촌문제와 인권에 대한 생각을 말씀해주세요.

"앞서 말했듯이 농업, 농촌, 농민문제에 대해 현 정부나 여당 국회의원들 뿐 아니라 정치인들의 관심은 물론 문제의식은 전무한 상태라고 봅니다. 농업이 죽고 농촌이 농민이 건강하지 못하고 제 역할을 못해 낸다면 주권국가는 물론 자주 국민이 될 수가 없지요. 농업이 망하고 농민이 죽으면 우리 국민 모두가 함께 죽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의 참 뜻을 되새겨 보면 좋겠어요. 심을 씨앗이 없고, 씨앗을 심을 땅이 없고,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가꿀 농민이 없어지는 날을 생각해 보세요. 과연 그때 가서도 국민들이 지금처럼 걱정 없이 밥상을 차릴 수 있을까요?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에게 있어 농민은 선거 때 표 찍어 주는 것 외에는 관심 없습니다. 대통령은 외국에 나가서 테러로 사람을 죽게 하는 것은 용서 할 없다고 했습니다. 그럼 백남기 농민은 국가가 저지른 폭력, 테러로 경찰이 조준 발사한 물대포에 맞아 치명적인 뇌 손상으로 지금 9개월이 넘도록 의식불명상태에서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 갇혀있습니다.

국민의 안전과 평화를 책임져야 할 대통령은 단 한 번도 방문은커녕 사과 한 마디 없어요. 인면수심(人面獸心). 이는 농민을 국민으로도, 사람으로도 여기지 않는다는 뜻 아닌가요?

농민이 한 인간으로 또 국민으로서의 인권이란 것을 어디서 찾고 어떻게 보장 받을 수 있을까요? 힘없고 약한 자들의 인권은 하늘에 별처럼 느껴지는 대한민국!

지금 백남기 형제는 약물에 의존하여 숨쉬기, 피돌기, 체온조절, 맥박 등 모든 것을 자기 힘으로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이 9개월이 넘기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마냥 바라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가족들의 몸과 마음의 상처와 가족들의 인권은 어디서 어떻게 치유 받고 보상 받을 수 있을까요?"

 

- 올해도 11월에 민중총궐기가 준비되고 있습니다. 시급히 해결해야 할 농업, 농민문제는 무엇인지요.

"첫째, 277만 농민을 대표하여 국가폭력에 의해 사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백남기 형제의 국가폭력 진상규명 청문회를 꼭 열어 온 국민에게 그 진실을 밝혀야 하고, 대통령이 공식 사과하고, 관계 경찰 책임자 가려내어 처벌해야 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둘째, 우리농업이 바로 설 수 있게 개사료값보다 못한 쌀값을 보장하고, 농산물 가격 보장과 국민의 안전과 식량주권의 기본인 우리농업을 보호하고 지킬 수 있는 농업정책을 수립, 실천할 수 있는 법안 마련이 우선 되어야 할 것입니다."

 

- 백남기 농민의 국가폭력 사태를 통해 우리 국민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고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점은 무엇일까요?

"백남기 형제에게 저지른 국가폭력은 백 형제 한 사람이 아니라 277만 농민을 향해 자행한 짓이며 백 형제는 277만 농민을 대표하여 희생당한 농민입니다. 우리 국민의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어머니인 농민에게 가한 국가폭력은 바로 우리국민의 안녕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 또한 언제 나에게 이러한 테러가 일어날지 알 수 없다는 점을 우리는 잊지 말 아야 할 것입니다.

또 우리 국민의 안전한 밥상을 책임지는 농업과 농민이 건강하게, 안심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어야 함은 당연한 것입니다. 따라서 농민이 안전한 먹을거리 생산자로 우뚝 설 수 있게 하려면 온 국민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정치인들이 알게 해야 합니다. 국회의원들이 자기밥그릇 챙기는 것 못지않게 농업, 농민에 대한 올바른 정책을 수립해서 집행할 수 있게 챙기라고 국민들의 압력이 보태어 지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 백남기 농민에게 한 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쌀 한 가마니도 번쩍 들어 올리던 청년 백남기 형제, 이제는 쌀 한 말 들기도 힘에 부칠 백발이 성성한 늙은 농민이 되어 맨손으로 개사료값 보다 못한 쌀값 좀 올려 달라고 서울에 올라 왔다가 예상치 못한 국가폭력 살인진압 물대포에 맞아 의식불명 상태가 된 이후 하느님의 기적을 간절히 바라며 기도 하고 있습니다.

벌떡 일어나서 ‘나 백남기는, 우리농민은 죽지 않았다’라고, 인간이기를 포기한 저 폭력테러를 자행한 자들에게 크게 외치고 2015년 11월14일 새벽길 나섰던 전남 보성 웅치 집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 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당신은 이 시대 대한민국의 아픔을, 우리 농업, 농민의 절박한 현실을 지금까지 충분히 우리 국민에게 뿐 아니라 전 세계인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70평생을 참 잘 살아왔듯이 앞으로도 잘 살아 갈 것입니다. 일어나요. 당신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따뜻한 손잡고 가요. 당신을 사랑하는 우리 모두의 소망이고 희망입니다."

 

임봉재 선생은 경남 산청에 거주하시고 생명평화결사 평생교사입니다. 가톨릭농민회 회장을 지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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