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1

우리 역사에 큰 아픔으로 새겨져 있는 한국전쟁, 수많은 사연이 있는 그 속에는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것을 하나씩 찾아서 상처를 치유하고 남북의 화해와 공동번영, 민족통일의 희망찬 미래를 열어나가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하는 바람에서 이 연재를 시작한다.

1985년 9월 북한의 허담 비서(당시 조선로동당 대남담당 비서)가 비밀리에 남쪽을 방문하여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한 적이 있었다. 
“김일성주석께서 서울에 오신 적이 없는데 이번에 한번 오셔야지요.”
경기도 가평에 있는 한 별장에서 극비리에 열린 이 회담에서 남측 대표인 장세동 부장(당시 안기부장)은 허담 비서에게 이런 덕담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허담의 대답이 회담에 참가한 남측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수령님께서는 전쟁때 서울에 다녀가신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김일성 주석이 전쟁때 서울까지 왔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실제로 김일성 주석은 1950년 7월 중순과 7월말 그리고 8월초 최소 세차례 이상 서울에 다녀갔거나 서울을 거쳐 남쪽으로 내려간 적이 있었다. 

충청북도 수안보에는 전쟁때 김일성 주석이 다녀갔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다. 
1950년 7월말∼8월초에 인민군 전선사령부가 자리잡고 있던 수안보에 인민군 최고사령관인 김일성 주석(당시 내각수상, 이하 수상으로 칭함)이 다녀갔다는 사실은 북한의 역사자료뿐만 아니라 괴산군 상모면지(수안보의 옛행정구역 이름)와 언론보도 등 남한에서 나온 여러 자료들에서도 기록되어 있다. 
수안보 일대에서는 심지어 김일성 수상이 ‘수안보온천에서 온천욕을 했다.’ ‘수안보온천에서 1박 하였다.’는 이야기까지 만들어졌다. 충주에서 수안보로 오는 길목에 있는 큰 바위에는 김일성 수상이 지도를 펼쳐놓고 작전지시를 내렸다고 하며 “김일성바위”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충주-수안보 도로변에 있는 김일성바위
▲충주-수안보 도로변에 있는 김일성바위

이와 달리 전쟁때 김일성 수상이 전라남도 광주시(지금의 광주광역시)까지 왔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인민군 최고사령관이었던 김일성 수상은 1950년 8월 11일 광주를 방문하였다. 
김일성 수상이 낮밤없이 벌어지는 미군비행기의 폭격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 광주까지 내려오게 된 이유는 ‘광주를 비롯한 서남지구에서 서남해안방어를 강화하고 이 지역들에서 당, 기관들을 복구정비하며 토지개혁을 비롯한 민주개혁을 빨리 실현할 데 대한 해결 방침을 제시’하기 위한 때문이라고 한다.

▲김일성 주석이 전쟁당시 전선시찰에 사용한 차량
▲김일성 주석이 전쟁당시 전선시찰에 사용한 차량

김일성 수상이 광주에 다녀갔다는 이 사실은 소설가 정지아가 1990년에 써낸 수기소설 ‘빨치산의 딸’에서 언급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정지아는 소설에서 “김일성수상의 남반부 순시”라는 중간제목을 달고 김일성 수상의 광주 방문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8월 9일,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유난히 더운 날이었다. 전쟁 탓이었는지, 아니면 워낙 경황없이 일에 쫓겼던 탓인지 50년의 여름은 기억속의 어느 여름보다 끔찍하게 더웠는데, 그날은 새벽참부터 아예 찜통이었다. 오전10시경 김선우(당시 로동당 전남도당 부위원장)가 급하게 그를 찾았다. 어딘지 흥분되고 들뜬 기색이었다.
“혁운 동무! 오늘 경사스런 일이 생겼는데 무슨 일인지 짐작이나 되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하고 과묵하던 김선우에게 저토록 흥분되는 일이 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글쎄요?”
“아하, 한번 알아맞춰 보시오.”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기라도 했나? 아니면 죽었다던 동지가 살아 돌아오기라도 했나? 그가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모습을 장난스럽게 바라보던 김선우가 갑자기 그의 귀를 바싹 끌어당기더니 비밀많은 소녀아이처럼 나지막이 속삭였다.
“극비요, 극비. 지금 중앙에서 귀중한 손님이 전선 시찰 나오셨다가 여기 들렸소.”
“예?”
김선우가 저렇게 흥분할 정도의 귀중한 손님이라면…. 갑자기 부동자세를 취하는 그를 보며 김선우는 비밀스럽게 도당위원장실을 가리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김일성 수상동지요.”
김선우의 손짓을 바라보는 그의 가슴도 쿵쿵 뛰기 시작했다. 벌써 몇년 전 조용식과 함께 서울 상경을 꿈꾸며 호기심 반. 흥분 반으로 두근거리던 꼭 그때의 설렘 같았다.
“그런데, 왜 저를…?"
”응. 다름 아니라 손님을 위한 일체의 접대를 혁운 동무가 맡아 주어야겠소. 식사나 음료수까지 손님의 안전을 혁운 동무가 책임지는 거요.”
손님을 뵈러 가자는 말에 그는 날다시피 경리과로 달려갔다. 직접 물을 끓여 작설차를 준비한 그는 쟁반을 든 채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심장이 멈추는 게 아닐까 두려울 지경이었다. 일제 때부터 무산계급의 해방을 위해 신출귀몰하게 싸워온 그 유명한 지도자를 직접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 좀체 믿기지않았다.
손님은 소파 한가운데 앉아 북쪽보다 더운 날씨 탓인지 연신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키가 훤칠하게 크고 부담스러울 만큼 잘생긴 손님은 지도자다운 위엄이 흘러넘쳤다. 그가 떨리는 손으로 작설차를 내려놓자 김선우가 그를 소개했다.
“이 유혁운 동무는 철도노동자 출신으로 현재 살아있는 도당 빨치산출신 중에 가장 나이가 어립니다. 지금은 도당 조직부부장직을 맡고 있는데 나날이 발전하는, 대단히 유능한 동무입니다.”
조금의 빈틈도 없이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손님이 웃음 띤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조금 전의 근엄했던 모습과는 달리 큰형이나 아버지처럼 포근하고 다정한 웃음이었다. 악수를 나눈 그의 손을 끌어당기며 손님이 말했다.
“이쪽으로 좀 앉아요.”
그는 조심스럽게 손님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박영발(당시 로동당 전남도당 위원장)옆으로 앉았다. 여전히 가슴은 두근거리고 머리는 여름날의 신작로처럼 하얗게 비어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중략)
오후 3시경 점심을 마친 손님은 타고 왔던 전북 넘버의 자가용 트럭을 타고 배웅도 마다한 채 어디론가 떠나갔다. 그로서는 꿈결같은 만남이었다.

유혁운(본명 정운창)의 증언은 매우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김일성 수상의 광주방문이 사실일리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무엇보다 평양에서 광주는 천리길인데, 최고사령관이 위험천만한 길을 달려 최전선이나 다름없는 곳까지 내려온다는 것을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지아는 “그러나 최근의 어떤 증언에 의하면 김일성은 비밀리에 낙동강 전선 시찰을 다녀갔을 뿐 광주에는 들른 적이 없고 아마 장시우 상업상을 김일성으로 착각한 모양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왜 김선우나 박영발이 장시우를 김일성으로 둔갑시켰는지 모를 일이다. 누가 옳은 것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유혁운은 지금도 당시 만났던 사람이 수상이었다고 굳게 믿고 있다.”는 부연설명을 달기도 했다.

하지만 김일성수상이 1950년 8월초 광주를 방문한 것은 사실이다. 
전쟁이 시작된 후 세 번째로 서울에 온 김일성 수상은 8월 10일 서울을 출발하여 그날 오후 8시경 수안보에 있는 전선사령부에 도착하였다. 그날 밤 늦게 수안보에서 출발한 김일성 수상은 대전과 전주를 거쳐 8월 11일 아침에 광주에 도착하였다. 

▲광주방문경로
▲광주방문경로

이같은 김일성 수상의 광주방문은 로동신문이 2017년 7월 24일자에 “길이 전하는 천리전선길 – 조국의 최남단 광주에 새겨진 강철의 령장의 거룩한 행로를 더듬어”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함으로서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어지는 글은 김일성 수상의 광주방문 내용과 장소 ...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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