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져가던 국가보안법이 연일 칼춤을 춘다. 5월에만 벌써 4건째다.

▲4.27시대연구원 이정훈 연구위원 국가보안법상 회합·통신 혐의 압수수색과 구속(14일),

▲범민련 원진욱 사무처장 외 1명 국가보안법상 회합·통신 등 혐의 기소 통보(15일)

▲민족사랑방 김승균 대표 국가보안법상 찬양·고무 혐의 압수수색(26일),

▲충북청년신문 손종표 대표 외 3인 국가보안법상 회합·통신 혐의 압수수색(27일).

박물관에 있던 국가보안법이 왜 지금 뛰쳐나온 것일까?

국가보안법 폐지 10만 청원이 달성돼 존폐 위기에 몰린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고, 국정원법 개정으로 대공수사권이 경찰청 안보수사국으로 이전되는 것도 이유일 수 있다. 말하자면 국가보안법으로 연명해 온 검경 내 공안세력이 생존을 위해 몸부림친 것. 하지만, 진짜 이유는 더 두꺼운 가면을 쓰고 있다.

민주정부 하에서 국가보안법이 준동한 예는 드물다. 특히 촛불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에서 공안사건이 이렇게 터질 것이라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다.

더구나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시절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거나 최소한 제7조(찬양 고무 등)만이라도 개정하겠다고 공약했고, 더불어민주당은 단독으로 국가보안법을 폐지할 수 있는 과반 의석을 확보한 상태다. 그런데 왜 문재인 정부는 국가보안법의 칼춤을 묵인 방조했을까?

문재인 정부가 과거 분단독재 세력들처럼 국가보안법을 공안탄압에 악용할 리 없다. 그렇다면 왜? 칼춤 뒤의 가면을 벗기기 위해선 국가보안법 사건의 90%를 차지하던 7조(찬양 고무 등)가 아니라 8조(회합 통신 등) 위반 사건이 속출하는 데 주목해야 한다.

지금까지 국가보안법 제8조는 사문화돼 있었다. 왜냐하면, 6.15공동선언 이전에는 북한(조선) 사람과 회합 통신이 불가능했고, 이후에는 누구나 회합 통신을 했기 때문이다. 2000년대 평양 방문자 4만 명, 금강산을 200만 명이 다녀온 데다가, 인터넷과 SNS의 발달로 자유롭게 북한(조선) 동포와 소통이 가능해졌다.

사실 회합 통신으로 죄를 묻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이정훈 연구위원, 원진욱 사무처장, 손종표 대표에 8조를 적용했고, 김승균 대표에까지 회합 통신 여부를 취조했다.

혹시 여론에 밀려 국가보안법 7조가 폐지될 경우를 대비해, 대신 8조를 적용한 판례를 만들려는 것일까? 그럴 수도 있지만, 문제의 본질은 더 깊이 숨어있다.

국가보안법과 대북제재 사이

문재인 정부에서 국가보안법 8조(회합 통신 등) 위반을 걸고 드는 이유는 대북제재와 관련 있다.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도 확인했지만 문재인 정부는 미국의 승인 없이는 대북 경제교류를 재개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런데 사업가들이 개별적으로 대북 투자를 진행할 경우 마땅한 제재 방안이 없다. 남북교류협력법으로는 부족하다. 그렇다고 미국의 대북제재를 우리 기업가들에 적용할 수도 없는 일.

결국, 남북 경제교류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8조(회합 통신 등)를 적용, 만남 자체를 차단함으로써 미국에 우리의 대북제재 의지를 증명하려는 것이다.

국가보안법상 회합 통신 혐의로 감옥 가고, 압수수색 받는 광경을 보고 나서 누가, 어떤 사업가가 대북 경제교류에 나서겠는가. 개성에 이미 자기 공장이 있는 기업가들도 겁이 나서 몇십억 투자금을 홀라당 날리고도 입도 뻥긋 못하는 판이다.

이런 선례는 IT사업가 김호 씨 사건에서 이미 확인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앞두고 미국이 한국의 대북제재 이행 의지에 의혹을 가지던 2018년 8월, 김호 씨는 국가보안법상 기밀누설, 금품수수, 편의제공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 되었다.

당시 사건을 수사한 국정원은 “김호 씨 사건은 이념문제가 아니다”라고 밝혀, ‘내국인을 대북 제재 위반으로 기소할 수 없으니 국가보안법을 적용했다’는 합리적 의심을 샀다.

공안정국 조성용으로 악용되던 국가보안법이 문재인 정부 들어 미국의 대북제재 이행을 위한 대체법안으로 기능한다. 국가보안법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 걸면 코걸이 식의 위험한 악법임이 또 한 번 입증되었다.

공안당국은 국가보안법 8조(회합 통신 등)를 자의적 판단에 따라 민간교류에만 선별 적용한다. 이로 인해 남북 간 민간 차원의 모든 교류가 원천적으로 차단되었다. 앞으로 설사 코로나19 상황이 풀린다 해도 국가보안법 8조가 두려워 남북 간 민간교류와 기업의 경제협력은 불가능해 졌다.

대선을 앞둔 문재인 정부는 남북교류보다 한미동맹에 더 충실하다는 것을 미국이 믿어줘야 정권재창출이 가능하다고 보는 듯하다. 그렇다면 2018년 평양에서 한 연설 “8천만 겨레의 손을 굳게 잡고 새로운 조국을 만들어나갈 것”(2018.9.19)이라던 그날의 약속을 저버린 후과는 어떻게 감당할 셈인가.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