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에 남는 사람]1주기 맞은 인권변호사, 전 통합진보당 최고위원 김승교 동지의 삶과 투쟁

아직도 실감나지 않는다. 추모제, 추도식, 제사, 모든 것이 어렵다. 화면 속에서, 그림 속에서, 사진 속에서 항상 웃고 있는 동지는 금세 술 한 잔, 밥 한 끼 하자고 할 듯하다.

1주기 추모문화제, 추도식을 마쳤지만 꿈을 꾼 느낌이다. 이 나라에서 진보운동을 하다보면 1년 정도 헤어지는 경우는 허다하지 않은가. 이러다보면 어느새 그 분이 우리 곁으로 돌아올 것 같다.

동지들의 눈물과 흐느낌을 볼 때만 느껴진다. 아, 그 분이 곁에 없구나.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셨구나. 그럴 때면 참았던 눈물과 울분이 솟구쳐 참을 수가 없다.

지난 1년, 많은 사람들이 김승교 동지와의 추억을 내놓았다. 그 추억들이 김승교 동지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학생운동을 함께 한 분들은 김승교를 조용한 사람으로 추억한다. 그리고 조용하지만 뚝심 있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고려대학교 법대 86학번. 어둡고 무거운 시대에서 동지는 앞장 선 선후배들 곁을 떠나지 않았다. 법대 사회부장을 맡은 김승교 동지는 현장에서도 선봉이었다.

변호사가 되고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이적단체 판결로 탄압의 칼날 위에 놓여 있던 한총련이었다. 나도 그 분을 그렇게 만났다. 그는 한총련 변호사라는 별칭도 가졌다. 지금은 그 시절을 추억하며 웃을 수 있지만, 당시에 한총련 변호사라는 수식은 사회활동에서 굴레였다. 작년 장례식장에서는 당시에 변호를 받았던 대학생들을 찾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분을 인권변호사라고만 부를 수는 없다. 김승교 동지가 떠나고 자료를 모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놀란 것 중의 하나가 방대한 기고문들이었다. 양도 양이지만 다양한 분야도 놀라웠다. 인권, 국가보안법, 미국문제, 통일문제까지 관여하지 않은 부분을 찾기가 더 어려웠다. 법정에서 펼친 그 분의 논리정연하고 예리한 변론이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살아온 김승교 동지가 진보정치에 몸을 담은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진보정치가 조명을 받고 박수를 받는 곳이었다면 그 분은 망설였을 것이다. 척박한 지역정치에서도 후보출마를 통해서 진보정치의 씨를 뿌리기 위해 나섰다. 진보통합의 기운으로 분위기가 좋다고 할 때는 남 먼저 후보 출마를 포기하고 단결의 모범이 되었다.

그리고 통합진보당에게 공안탄압이 총집중될 때 김승교 동지는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통합진보당 최고위원을 하겠다고 나섰다. 통합진보당 해산의 광풍이 불 때는 법조인의 경험을 내세워 아예 칼날 위에 서기를 자청했다. 변호사이면서 운동가였던 김승교 동지. 운동가라는 표현이 더 맞는 김승교 동지였다.

김승교 동지는 어떤 자리에서도 좀체 나서는 일이 없었다. 사석에서도 그랬고, 공석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고, 당직 선거에도 나갔지만 남들 앞에서 소리 높여 호소하고 주장하는 것이 영 어색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진보정치 앞장에 선 그의 진정성은 더 빛났다.

일상에서 동지는 예의가 바른 사람이었다. 어느 자리에서도 원로 어르신들에 대해서 꼼꼼하게 신경을 썼다. 자리가 불편할까, 음식이 맞지 않을까를 하나하나 살폈다. 또 나이차가 많이 나는 후배들을 대할 때도 권위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항상 귀 기울여 후배들 의견을 경청했고, 칭찬을 앞세웠다. 그런 사람이었다.

진보정치가 단결하기를 갈망하고 갈망했다. 오랜 시간 김승교 동지와 사업을 하면서 다른 동지, 다른 단체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없다. 신기했다. 다시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전무하다. 후배들이 이런 저런 하소연을 하며 다른 단위를 평가라도 하면 어떤 반응도 없었다. ‘이런 이유, 저런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요’ 하면서 이해를 도우는 말 외에는 하지 않았다.

이것은 품성의 문제가 아니었다. 단결을 그만큼 절실하게 원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지금 많은 분들이 김승교 동지의 빈자리를 안타까워한다.

김승교 동지의 유언이 사람들 사이에 아직도 회자가 된다. 모두가 동지들에 대한 이야기다. 동지들에 대한 미안함, 동지들에 대한 죄송함, 동지들에 대한 기대, 동지들에 대한 믿음, 동지들을 다시 만날 희망. 시작도 동지였고 끝도 동지였다.

김승교 동지는 그렇게 갔다. 깨끗하게 살았고, 깨끗하게 떠났다. 김승교 동지는 갔지만 김승교 동지는 영원히 남았다. 애국으로 사는 우리의 심장 속에, 동지애로 싸우는 우리의 주먹 속에.

 

<동지들 진정 고마웠소>

 

동지들 면목없소!

최후승리의 날까지 동지들 곁에서 동지들을 지키며 동지들과 함께하려했건만 이제 그 약속을 지킬 수가 없을 것같소.

동지들 고마웠소!

나는 진심으로 동지들에게 반했고 동지들을 좋아했더랬소.

헌신적이고, 겸손하며, 예의바르고,

자신을 낮추어 다른이를 높일줄 아는 동지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새것을 모색하고,

누구보다 사랑과 신념이 굳세며, 용감하고,

누구나 꺼릴 어려운 초소 맨앞장에 서길 주저하지 않고,

이름없는 전사로 사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알아 일을해도 공을 탐하지 않고 오로지 조국과 민족에 득이 되는것으로 족할줄 아는 속이 깨끗한 동지들이었소.

그 많은 전업상근자를 두고 그럼에도 상근비를 한푼도 받지 못하는 제일 가난한 운동가들이었소.

그럼에도 낙관에 넘쳐 늘 웃으며살고 일도 척척 잘해내는 동지들이었소.

그런 동지들과 오래 함께해서 즐거웠고 행복했소.

동지들 미안하오!

동지들과 연을 맺은지 어느듯 20여 성상이 다되어가는구려. 그 사이 떠나가고 흩어지고 낙오한 이들도 더러 있었지만, 새로 만난 동지들이 더 많았구려. 돌아보니, 새 동지들과의 인연에는 내가 참으로 소홀했구나라는 뒤늦은 후회와 자책이 이는구려, 미안하오.

존경했고 사랑했던 동지들!

나는 동지들이

밥한끼라도, 술한번이라도 근심걱정없이 즐길수 있기를... 단하루만이라도 자신을 위해 사고픈것사고 하고픈것 맘편히 하기를 바랬소. 이젠 그것마저 도와줄 수 없게 되었구려.

우리가 어디로 어떻게 갈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나보다 남은 동지들이 더 빨리 더 잘 찾으리라 믿기 때문이오. 다만, 산첩첩 물겹겹이어 길이 험하고 안보여도 '꽃향기 그윽하고 술 익는 마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은 꼭 잊지 말아주시오.

동지들 진정 고마웠소!

최후승리의 날, 우리 동지들이 백발의 원로선생님들, 선배투사들을 모시고 터질듯한 환희속에 축복받을 때... 나도 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로라도, 지저귀는 새소리로라도, 기쁨의 빗물로라도, 눈부신 햇살로라도 함께하리다. 그때까지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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