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무기수 88세, 박종린
만경대혁명학원출신 비전향장기수가 남녘 동포에게 전하는 인사

올해 88살의 늙은이 박종린입니다.

▲사진 : 민병래
▲사진 : 민병래

저는 1933년 중국 길림성 훈춘에서 태어나 해방되는 해에 함경북도 경원으로 들어갔지요. 27살인 59년 통신부대 소좌로서 남쪽에 내려왔다가 체포되어 지금까지 예서 살고 있으니 60년이 흘렀네요. 북녘 땅에서 산 세월은 고작 15년.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몇 배가 더 많습니다.

일가친척도 아무런 연고도 없었던 남녘땅.

93년 대구교도소에서 출소한 이래 소중한 인연이 많았습니다. 용학교회 임영창 목사님과 신도들, 학교 매점에서 일할 때 나를 통일할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랐던 학생들, 노동운동을 하는 청년들. 함께 고통을 겪었던 장기수 동지들... 그들과 함께 한 시간은 행복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도 정이 많이 들었고 주인집 내외도 따뜻하게 대해주고 있습니다. 아들처럼 제게 효성을 보여주는 이도 있고요.

나는 현재 기초생활수급자여서 한 달에 39만원, 거기에 노인수당 30만원을 합쳐서 69만원을 정부로부터 꼬박꼬박 받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4급 장애인 판정을 받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3시간씩 요양사가 나를 돌봐주고 있습니다. 당뇨, 고혈압에 2017년도부터 대장암을 앓고 있어서 약값과 건강식품비가 제법 들지만 수급자인 덕에 약값은 공짜입니다. 그래서 병든 이 한 몸, 살아갈 만합니다. 이 모두 남쪽 동포들의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 박종린 선생의 팔순 사진 장기수 동지들과 양심수후원회가 마련해 준 자리다 [사진 : 박종린 선생]
▲ 박종린 선생의 팔순 사진 장기수 동지들과 양심수후원회가 마련해 준 자리다 [사진 : 박종린 선생]

90세를 바라보는 나이니 살날이 얼마나 남았을지 죽기 전에 북녘 땅을 밟아 외동 딸 옥희를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삶을 정리하는 마음으로 남녘 동포들에게 제가 살아온 이야기 한 토막 남기고자 합니다. 아스라한 기억들이어서 이제는 뿌옇고 그저 공백이 많을 뿐입니다.

불가에서는 “아니 온 듯 다녀가소서”란 말이 있지요. 이 늙은이가 욕심을 부린 바는 없지만 이 땅이 안고 있는 상처만큼 제 삶에도 깊은 상흔이 있습니다. 이제 이런 아픔은 이 늙은 몸이 눈을 감을 때쯤 이 땅에서 사라졌으면 합니다.

▲ 당시 모란봉 사건에 대한 기사 1960년 당시 기사화된 사진 캡처본
▲ 당시 모란봉 사건에 대한 기사 1960년 당시 기사화된 사진 캡처본

나는 1959년 남파되어 ‘모란봉간첩단’ 사건으로, 1976년 대구교도소 내 ‘붉은 별’ 사건으로 두 번의 무기징역을 받아 34년간 교도소에서 있었습니다. 넬슨 만델라가 27년을 살았으나 수감기간으로는 제가 형님뻘입니다. 물론 이 34년도, 45년 동안 수감되어 세계 최장기수의 기록을 갖고 있는 김선명 선생에 비하면 한참이나 아래지요. 다만 쌍무기수라는 점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기록이더군요.

59년 대리파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박종린을 무기징역에 처한다. 나머지 박선철, 임영찬 무죄, 박호련도 그간 대한민국에 세운 공로를 참작 무죄를 선고한다.” 

1960년 10월 28일 서울고법 형사4부 재판장 임항절은 선고를 마치자마자 재판장을 빠져나갔다. 나는 판결이 내려지는 순간 얼떨떨했다. 방청석에서 지켜보다 무죄판결을 받은 이들의 가족은 박수를 치고 기뻐했다. 나의 망책이었던 박호련은 고개를 돌리며 눈길을 피했다. 교도관 두 명이 다가와 나의 옆구리에 팔짱을 끼고, 다른 두 명은 앞뒤로 서서 포승줄을 동여매며 수갑을 조였다.

호송차를 타고 서대문형무소로 돌아가는데 창문 밖으로는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하나씩 떨어지고 플라타너스 잎사귀에도 스산함이 내려앉았다. 멀리 교도소 뒤 안산에서는 단풍나무가 어느새 능금 빛깔을 잃어버렸고...

형무소로 돌아와 나는 사건을 되짚어보았다. 정리가 잘 안 되었다. 어떻게 박호련은 무죄가 되었나? 역공작의 공로를 참작하다니?

나는 59년 남파될 때 소좌 계급으로 911통신부대에서 일했다. 이 부대는 53년 정전 후에 모든 통신관련부서들을 모아 만든 조직이었다. 나는 여기서 통일사업일꾼들에게 모르스부호나 난수표 등을 교육시켰다.

당시 48살의 군당 조직부장 한 명이 파견을 앞두고 교육 중이었는데 난수표를 힘들어 했다. 접선날짜가 다가와도 교육에 진전이 없자 나는 책임감을 느껴 “남쪽에 대신 다녀오겠다”고 상부에 제안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방학세 내무상이 나를 호출해, “나서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는 해방전 소련정보기관 간부였고 정권수립 시 내무국 정보처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그때 나는 오백룡 정보호위국장에게도 자문을 구했는데 그도 역시 반대하며 ‘교관’업무에만 충실하라고 했다. 오백룡은 동북항일연군에서 (경위련 연장으로) 보천보 전투에 참가했고 1945년 8월 9일 88여단과 함께 함경북도 웅기에 상륙하는 등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이런 경력 덕에 조선인민군 8사단장을 맡았고 나중에는 당 중앙위원까지 되었다.

나는 1950년 조국전쟁 당시 18살로 만경대 혁명학원 3학년이었다. 학교방침을 무시하고 나는 친구들과 뛰쳐나가 8사단이 있던 강릉으로 가서 오백룡 사단장의 호위부대에 들어갔다. 그 인연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그에게 의견을 묻곤 했다.

내가 대리파견되는 데에는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이라는 점도 걸림돌이었다. 만경대혁명학원은 항일운동열사들의 자녀를 위해서 세워진 학교였다. 1947년 10월 12일 평안남도 대성군에 세워져 처음 명칭은 ‘평양 혁명자 유가족 학원’이었다(1948년, 평양 만경대에 교사를 신축이전하면서 이름이 만경대혁명학원으로 바뀌게 된다).

북조선은 1946년부터 38선 이북과 만주지역 일대에서 항일혁명가 유자녀들을 모으기 위해 각별히 노력했다. 이 자녀들을 보살펴 향후 나라의 동량으로 키운다는 구상이었다. 그래서 만경대출신인 내가 직접 연락원으로 나가는 걸 주변에서는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접선날짜는 다가오고 다른 요원을 보내기가 여의치 않았다. 결국 내가 내려가기로 결정이 되어 일주일간 남쪽 사정에 대해 교육을 받았다. 전쟁 시기에 팔공산 쪽으로 내려간 이후 처음으로 남쪽 땅을 밟게 된 것이다.

▲ 2020년 6월 초 1차 구술 당시 1차 구술을 마치고 선생의 집앞에서 된장찌개를 먹으러 식당에 갔을 때 찍은 모습 [사진 : 민병래]
▲ 2020년 6월 초 1차 구술 당시 1차 구술을 마치고 선생의 집앞에서 된장찌개를 먹으러 식당에 갔을 때 찍은 모습 [사진 : 민병래]

내가 만날 남쪽의 선은 박호련, 그는 방학세 내무상이 직접 관리하는 인물이었다. 함북 길주가 고향인 그는 해방되는 날에 입당해서 38보위부 정보과장을 맡았다. 그는 휘하의 임영찬이 배신해서 남쪽으로 내려가자, 문책을 받고 평양감옥에 갇혔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남쪽 군대가 올라왔을 때 미군은 그의 활용가치가 높을 것으로 보고 대북정보요원으로 포섭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박호련은 이런 가능성을 내다보고 방학세 내무상이 위장으로 투옥을 시킨 것이었다. 그는 정전 후에 중령이 되어 특무대, 첩보부대, 미 정보기관에서 대북첩보업무를 수행했다. 북에서는 박호련의 위치를 뒷받침하기 위해 적당한 때 적당한 정보를 대주었다.

내가 내려간 루트는 강원도 양구 문등리의 전방 GP, 북으로 파견된 요원이 귀환하는 형식이었다. 전방 수색대가 나를 박호련에게 인계를 했고 나는 그의 짚차를 타고 서울 장충동 안전가옥으로 가서 은신했다.

3개월 기한으로 왔는데 북쪽 요원 훈련이 지지부진해 다시 3개월 연장되었다. 귀환 전날 무전기를 켜니 뜻밖에도 얼마 안 남은 (1960년)정부통령 선거결과까지 보고 오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래서 남쪽 체류가 길어지던 59년 12월 어느 날, 장충동 비밀가옥으로 들이닥친 특무대에 의해 나는 연행되었다. 한겨울이었는데 넓은 실내 훈련소가 취조실이었다. 벽난로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었고 쇠꼬챙이 하나가 달아올라 붉은 혀를 낼름대고 있었다. 수사관들은 그 꼬챙이를 들이밀면서 “사실대로 불라!”고 윽박질렀다.

취조를 받아보니 이미 사실관계와 조직도가 그려져 있었다. 박호련이 총책이고 그의 수하로 남쪽에 와 중령 계급장을 달았던 임영찬, 그리고 민주당 훈련부장인 박선철 이 세 명이 방학세의 지시에 따라 모란봉간첩단을 만들었고 나는 무전기 2대를 가져와 연락담당을 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거기에 맞춰서 진술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60년 3.15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에게 판세가 뒤지자 타개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민주당이 연루된 간첩단 사건으로 반전의 기회를 잡고자 ‘모란봉’이라 이름을 짓고 민주당 당료들과 의원들을 엮어 나간 것이다.

그런데 특무대의 이 작전은 당시 장도영 육군 정보국장도 “잘못한 일이다. 박호련은 대북첩보라인에서 중요한 인물인데 그렇게 써먹어서는 안 된다”며 직간접적인 불만을 드러냈다. 결국 2심 재판에서 박호련은 대한민국에 공을 많이 세웠다고 무죄방면이 되었다. 그는 북쪽의 기대와 달리 남쪽에 더 충성하는 이중스파이였던 것이다.

나는 2심 판결 이후 1961년 2월 18일 대법원 형사부 오필선 재판장으로부터 무기징역 확정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서울형무소에서 대구교도소로 이감을 갔다.

아버지는 조국광복회에서 활동한 항일운동가
내가 13살. 우리 집이 압록강 건너 훈춘에서 살고 있을 때 해방이 되었다. 그때 조국광복회에서 항일운동을 했던 아버지(박승진)는 7년간 갇혀있던 연길감옥에서 나왔다. 동지들이 거적데기에 실어 아버지를 모시고 왔다. 우리 가족은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고향 경원으로 돌아왔다. 시름시름 앓던 아버지는 해방 후 3개월이 되었을 때 ”당신의 경력으로 해방 조국에 부담을 주지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나는 어린 나이여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어머님은 까막눈이고 아버지는 바람같은 존재였다. 몇 달에 한 번, 심하면 몇 년 만에 한 번 오시기도 했으니 내게는 늘 손님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행적에 대해 잘 모르셨다. 형들도 어렸을 때였고... 그래서 아버지의 죽음은, 아버지의 장례는 안개 속을 걷는 느낌이었다.

아버지의 상을 치르고 나는 안농중학교에 편입했다가 1947년 만경대혁명학원에 중학교 3학년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4형제였지만 어머니는 나만 혁명학원으로 보냈다. 어머니는 “해방조국에서 특혜를 바라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담아두었던 모양이다. 학원에서 항일유격투쟁사와 군사학을 비롯 여러 기초과목을 배웠다. 교사들은 가족이나 친척이 대부분 항일투쟁과 연관되어 있었다.

학제는 해방 직후라 수시로 바뀌었지만 특설반, 초급반, 고급반으로 구성되어, 인민학교(초등)에서 고급중학교(중등)까지 과정이 있었다. 10개 학급에 약 350명 정도 유자녀가 공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1950년에 나는 18살로 9월에 졸업예정인 만경대학원 3학년이었다. 그런데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나면서 만경대학원 학생들에게는 엄격한 통제가 내려졌다. 학원생들은 졸업하면 군관학교로 진학할 예정이었다. 러시아와 동구로도 유학을 많이 갔는데 만경대 학원생들에 대한 정부의 배려였다.

학교가 통제 상태였지만 항일운동가 유자녀들이 모인 곳이라 참전 열기가 뜨거웠다. 나는 친구 일곱 명과 기숙사를 빠져나와 학교 담을 뛰어넘었다. 기차를 타고 평양에서 원산 그리고 양양으로 갔다. 당시 1여단이 인민군 8사단으로 개편되어 그곳에 있었는데 우리는 만경대학원 출신임을 숨긴 채 부대에 넣어달라고 졸랐다. 입대절차 없이 어린 학생들이 입대하겠다고 하니 부대에서는 의아하게 바라봤지만 고집을 부려 겨우 들어갔다.

당시 8사단장 오백룡은 만경대학원으로 강의를 나온 적이 있었다. 사단 순시 중에 모자를 푹 눌러쓴 우리를 눈여겨보더니 “야 임마, 너희들 여기 왜 왔어. 빨리 돌아가, 학교에서 난리다.”고 역정을 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전선으로 가겠다고 버텼다. 오백룡은 할 수 없이 우리를 데려가기로 하고 비교적 안전한 사단지휘부 호위소대에 배치했다. 지휘부를 따라 단양에서 안동, 의성, 그리고 대구 팔공산까지 나아갔다.

팔공산에 이르러서는 미군의 공중폭격에 병력 손실이 컸다. 쌕쌕이라고 불리는 머스탱이 로켓탄을 들이붓고 B29 중폭격기는 네이팜탄을 끝없이 퍼부었다. 폭탄 안의 기름이 함께 폭발하면서 폭탄이 떨어질 때마다 온통 불바다가 되고 잿더미가 되어 타격이 컸다.

공습으로 길이 끊기고 수송수단도 마땅치 않아 식량공급이 안됐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 상륙 이후는 더 심해져 주린 배와 싸우는 게 일이었다. 당시 전선이 위태로워 사단지휘부는 연락병만 남기고 모든 병력을 일선으로 보냈다. 나도 친구들과 최전선으로 나갔다. 이때는 부대 편성이 제대로 안 돼 한 개 중대가 18명 이하인 경우도 있을 정도로 심각했다.

9월 하순 어느 날 영천 부근 최전방에서 참호를 파고 공중폭격을 견디고 있었다. 공중포격이 끝나면 항상 지상전이 벌어졌다. 그날도 어김없이 폭격 후 육박전이 벌어졌는데 대검을 차고 내려가면서 싸우다 남쪽 군인과 엉켜 산비탈을 굴렀다. 이때 구르면서 머리를 돌에 부딪혀 큰 부상을 입었다. 만경대학원 친구가 구해줘 머리를 붕대로 동여매고 우리는 낙오된 상태에서 서로 의지하며 걸었다. 기초군사학 공부를 한 덕분에 북두칠성을 보고 밤길을 걸었다.

나는 야전병원이 있는 안동에 도착해서야 제대로 치료를 받았다. 당시 야전병원에는 후송가야할 사람이 수천 명이나 되었다. 전선이 더욱 급격히 밀리자 병원에서는 움직일 수 없는 사람에게 식량 일부와 모포만 주고 나머지는 모두 조별편성을 해서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나는 중좌 한 명이 50명으로 편성한 조에 들어갔다. 영주-원주-춘천을 거쳐 38선을 향해 밤에만 움직이면서 나아갔다. 이미 남측 군대가 북으로 올라갔기에 그 뒤를 따라 행군하는 기묘한 상황이었다. 춘천에 도착해보니 함께 출발한 50명 중 남은 사람은 18명뿐. 차가운 10월로 접어든 날씨에 야간 행군을 하다 보니 부상병들에겐 힘에 부쳤다.

인솔자인 중좌는 산악행군이 너무 더디니 해변으로 가야 한다며 춘천에서 원산으로 방향을 바꿨다. 원산 앞바다가 보이는 안변에 이르니 거기도 점령지가 되어 있었다. 평양은 괜찮겠지 하는 기대로 서쪽으로 방향을 바꿨는데 이미 압록강 경계까지 남쪽 군대가 올라갔다는 소식이 들렸다. 할 수 없이 태백산맥을 타고 자강도 쪽으로 나아갔다. 강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아군을 만나 옥수수를 먹으며 영양보충을 조금 했다. 야전병원도 있어서 한 달간 입원해 부상도 회복하고 몸을 추슬렀다.

퇴원 후 나는 평안북도 피현 골짜기에 있는 군관학교에서 50년 말부터 3개월간 통신훈련을 받았다. 최고사령부 통신연대의 1대대 1중대 1소대의 무선소대장이 되었고 정전이 되는 해에 중대장이 되었다. 정전 후에는 제1군관학교와 중급군관학교를 거쳐서 통신참모가 되었다. 이후 911부대에 배속되었다가 59년에 예기치 않게 남쪽으로 대리파견되어 결국 대구교도소에 수감되고 말았던 것이다.

라디오 청취가 붉은 별 사건으로 둔갑하다
“박종린 나와” 

어둠이 사동에 가득 내렸을 때 멀리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늦은 시간에 군화발 소리를 내면서 서너 명이 복도 끝에서 다가올 때 두려웠다. 교도관들에 이끌려 철창문을 두세 개 통과해서 보안과에 다다랐다. 보안과장 외에도 군복 점퍼를 입은 이들이 몇 몇 있었다. 그들은 나를 쏘아보며 “가지.”하고 차갑게 내뱉었다. 수갑을 차고 교도소 마당을 걸어가니 망루 탐조등이 쏟아지는 별빛을 거칠게 부서뜨리고 높은 담장은 보드라운 저녁 바람을 꽁꽁 묶어두고 있었다.

오랜만에 외출이었다. 61년 수감 된 이래 광주-전주-대전을 거쳐 대구교도소로 오기까지 이감 갈 때마다 호송차를 타긴 했지만 승용차를 타고 나가는 건 처음이었다. 그들은 차에 타자마자 덮개로 내 얼굴을 씌우고 차 밑으로 머리를 박게 했다. 저승길일지도 모르니 대구 시내 구경이나 시켜주면 좋으련만...

도착한 장소는 중앙정보부 대구경북지부였다. 눈이 감긴 채 지하실로 내려갔다. 정신을 차려야 할 것 같아서 나는 속으로 한 계단 한 계단을 세었다. 모두 열여덟 계단이었다.

취조실에서 백열등 하나만 밝혀져 있는 책상에 앉았다. 둘러보니 온통 이중벽이었다. 그들은 “‘소니라디오’에 송신기를 달아 북과 교신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나는 “‘라디오’를 들은 것은 사실이지만 교도소 안에는 부품 한 조각 없는데 어떻게 송신기나 무전기를 만들 수 있는가? 내가 통신부대 출신이지만 통신장비 기술자는 아니다“고 설명했다.

수사관들은 중앙정보부 본부에서 직접 내려온 사람들이었다. 수사관 2명이 일어서더니 ”야, 박종린 오랜만에 세수 좀 할래?“하며 웃통을 벗었다. 나는 순간 움찔했다. 60년 특무대에서 쇠꼬챙이로 당했던 고문이 떠올랐다. 그들이 얘기하는 세수는 바로 물고문이었다. ‘고춧가루’까지 탄 물을 마시며 이틀을 버텼다.

”북과 어떻게 교신했는지 말하라“고 볶아 대었지만 상상력을 아무리 동원해도 그들 요구를 맞춰줄 수가 없었다. 3일째인가 서울에서 내려온 상급자가 대구교도소 내 자생적인 사건으로 정리하자고 매듭을 지었다. 그 후로도 10여 일을 매일 밤 8시부터 그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수사를 받았다.

그들이 만든 결론은 교도소 내 ‘지하조직결성과 암약’이었다. 전영훈을 회장으로 나와 15명 되는 재소자들이 ‘붉은 별’이란 조직을 만들어 북측 방송을 청취하고 고무 찬양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회장으로 그려 넣은 전영훈은 신안군 출신의 장기수였다. 남로당원으로 신안군 내무서장을 맡았다가 지리산에 입산, 유격대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는 20년을 살고 출소한 상태였다.

그들은 재소자로만 이루어진 사건으로 하면 뭔가 약할 것 같으니 출소한 그를 그림 속으로 끌어들여 밖으로 조직 확대를 시도했다는 상상력을 불어넣었다. 불행히도 전영훈은 다시 잡혀 온 충격과 고문 후유증으로 재판받는 중에 자결을 하고 말았다.

70년대 중반, 내가 대전교도소에서 대구로 갔을 때 전향공작 광풍이 한차례 몰아치고 갔었다. 그래서 전향 당한 장기수는 물론 일반수들까지 억눌린 분위기였다. 나는 ‘모란봉간첩단사건’ 당시 변호인단이 ‘전향했다’고 자기들 마음대로 서류를 제출했다. 그래서 형이 확정된 이후 나는 ‘전향’으로 분류되어 있었고 방도 ‘전향사동’으로 배정받았다.

나는 대구교도소 내 전향 사동에서 사람들을 모아 재소자 인권투쟁을 시작했다. 우선 소지를 구워삶았다. 그를 통해 쓰레기가 된 신문쪼가리를 얻어서 바깥소식을 파악했다. 당시에 재소자들의 인권은 열악해서 신문이나 방송 청취가 불가능함은 물론 종이와 연필조차도 쓸 수 없었다. 은밀하면서도 적극적 행동에 장기수들은 다시 힘을 얻고, 일반수들도 소내 처우개선 문제에 대해 조금씩 눈떠갔다.

”라디오 하나 구할 수 없을까요?“
”네!? 너무 위험해요, 수시로 검방이 있는데...“
”1급수 중에 따르는 친구들이 몇몇 있으니 문제없을 겁니다.“

나는 운동을 나갈 때 동행 간수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나의 징역 생활 태도에 감복하고 있던 그는 알게 모르게 신문이나 서책 등 편의를 봐 주고 있던 터였다.

”라디오를 어디 쓸려고 합니까?“
”바깥소식을 매일 들어야 합니다. 알다시피 신문이나 방송은 재소자들 권리예요.“
”그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지금 긴급조치로 서슬이 퍼러니...“
”김형은 구해만 줘요, 내가 목숨 걸고 관리할테니...“

운동장으로 나가면서 우리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엿듣는 것은 쇠창살과 높은 천장뿐이었다. 내가 거듭 간청하자 교도관은 마침내 소니 라디오를 구해, 야간 당직 시에 내게 건네줬다. “이거 발각되면 모가지는 물론이요, 콩밥까지 먹으니 박선생님이 잘 관리해주세요”라고 몇 번씩 당부를 했다.

그날 밤부터 나는 라디오를 이불 속에 품고 국내방송은 물론 주파수가 잡히는 평양, 일본, 블라디보스톡 방송까지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출역을 나갈 때 검신을 안 하는 1급수 중 한 명의 지지자 허벅지에 라디오를 차고 나가게 했다. 재소자들이 작업장으로 나가면 교도관들이 매일 검방을 하기 때문에 방에 두고 다닐 수는 없었다.

라디오를 듣게 되면서 교도소 내에 생기가 돌았다. 항상 새로운 정보가 정확하게 전달되자 나를 중심으로 단결도 잘 되고 부식개선투쟁도 조금이나마 성과를 거두었다. 3년간이나 별 탈 없이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작업장에서 망치와 벤치가 없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소내에 비상이 걸렸다. 특히 망치는 흉기가 될 수 있으므로 작업장에서 1급수를 포함, 모든 출역자를 대상으로 검신이 진행되었다. 그때 나의 지지자는 당황해서 소니 라디오를 허벅지에서 꺼내 공장에서 만든 제품 사이에 숨겼다. 그런데 이 장면을 어떤 재소자가 봤고 그는 교도관에게 신고를 했다. 즉시 1급수가 연행되었고 이어서 나도 끌려갔다. ”라디오를 언제 어떻게 구입했냐? 밧데리는 어떻게 받았냐?“는 추궁과 뭇매가 함께 들어왔다.

동시에 대구교도소는 내가 있던 사동의 교도관들에 대한 감찰에 들어갔고 나를 도와준 교도관은 겁이 나 지레 자복하고 말았다.

어찌보면 교도소 내 사소한 사건으로 끝날 수 있는 일이 법무부로 보고되면서 중앙정보부가 냄새를 맡았다. 76년은 박정희 정권의 위기가 촉발되던 해였다. 72년 유신 헌법을 선포하고 74년에는 긴급조치를 발령하면서 박정희는 종신 총통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특히 75년의 긴급조치 9호는 집회와 시위는 말할 것도 없고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논의를 금지시켰다.

여기에 파열구를 낸 함성이 76년 3월 1일 민주구국선언이었다. 이 선언은 3.1운동 57주년을 기념하는 형식으로 명동성당에서 열린, 신구교 합동미사 중에 발표되었다. 함석헌, 문익환, 김대중, 이우정이 주도한 이 사건은 반향이 컸다. 이들 주모자들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입건되자 종교계에서는 3.1선언이 정당하다는 성명서가 잇달아 나왔다. 대학가에서는 이 선언문을 복사해 널리 배포하면서 유신체제에 맞서는 전선이 구축되었다.

이러한 정세에서 중앙정보부는 대구교도소 내에서 ’소니라디오‘로 북쪽 방송을 청취한 일로 뭔가 만들어보려 했다. ’붉은 별‘이라 이름 붙이고 조직도를 짜 맞췄다. 그렇지만 재판장은 내게 사형을 구형한 검찰에게 관리가 소홀해서 발생한 사건인데 과하지 않냐며 훈계까지 했다. 아무리 부풀려도 그저 ’교도소내 인권투쟁‘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반국가단체와 통신을 시도했다며 나는 다시 무기징역을 언도 받았다. 결국 ‘모란봉사건’과 ’붉은 별‘사건으로 두 번이나 무기형을 선고받은 쌍무기수가 된 것이다.

그 이후 나의 징역생활은 힘들었다. ’붉은 별‘사건으로 과거 전향분류는 무효가 되고 진짜 전향공작이 다가왔다. 어렵사리 버텨내고서야 징역생활은 평화(?)로웠다. 특히 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학생운동인사들이 대거 감옥 안으로 들어오면서 재소자들에 대한 인권이 많이 개선되었다. 서신과 집필이 자유로워지고 신문이나 방송도 접하게 되었다.

▲ 침대에서 휴식을 취하는 박종린 거의 대부분 일과를 지금은 누워서 생활할 수밖에 없는 상황 [사진 : 민병래]
▲ 침대에서 휴식을 취하는 박종린 거의 대부분 일과를 지금은 누워서 생활할 수밖에 없는 상황 [사진 : 민병래]

그렇지만 전향공작 때 당한 고문 후유증 때문인지 늘 시름시름 앓았다. 93년에 접어들면서는 몸무게가 겨우 40kg이 넘을 정도로 위태로웠다. 그 무렵부터 병보석 얘기가 나왔지만 법무부에서는 바깥에서 받아줄 인수자를 요구했다. 마침 같은 교도소에 있던 전국농민회 배종렬 회장이 무안의 용학교회 임영창 목사에게 연락을 했다. 임 목사는 1989년 평양방문 이래 장기수 구명을 위해 노력하는 문익환 목사의 제자였다. 덕분에 나는 바깥에 교회라는 끈이 만들어졌다.

그러자 대구교도소에서는 출소시켜줄 테니 전향하라고 다시 요구를 했다. 당시 학생들이 많이 들어올 때여서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반성문 수준이라며 회유했다. 교회에서도 석방되기 위한 형식상 절차이니 써주라고 권유했다. 그렇지만 나는 모두 거부하고 차라리 징역을 더 살고 여기서 죽겠다고 버텼다.

몸 상태가 더욱 안 좋아지자 대구교도소는 병보석하되 교회와 목사가 쓴 신병각서로 반성문을 대신한다고 결정했다. 마침내 나는 34년의 징역을 끝내고 93년 12월 24일 대구교도소 문을 열었다.

좌절된 1차 송환
”선생님은 전향자로 분류되어서 이번 송환에 해당이 안 됩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나는 34년을 살면서 그 가혹한 전향공작 때도 온 몸으로 버틴 사람입니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전화기를 붙잡고 사정하다시피 말했다. 2000년 6.15선언으로 ’비전향장기수‘송환이 합의되자 나도 들뜬 마음에 고향에 갈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41년 만의 귀향이다. 그런데 전향자여서 안 된다니...

알고 보니 목회자들의 신병인수서가 ‘종교를 받아들인 것’이고 ‘종교 활동’은 ‘사상적 전향’이라고 통일부에서는 판정한 것이다. 내가 전향자로 분류되어 송환명단에서 탈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목사들은 통일부에 강하게 항의했다

“전향여부를 기준으로 하다니, 강제전향공작을 당신들은 인정한다는 것이냐?”
“사상과 양심을 어떻게 강요할 수 있는냐?”
“박종린 선생은 우리 목사들이 신병인수서만 썼을 뿐이다. 전향의 전자도 없었다.”

통일부에 여러 경로로 이의를 제기했지만 방침이 그렇고 이미 결정되었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나는 할 수 없이 9월 2일, 1차 송환을 포기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장기수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기뻤던 그 날, 내게는 혹독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 로인숙이 평양으로 돌아온 장기수들 환영행사에서 나를 찾다가 그만 쓰러져 세상을 떠난 것이다. 북측에서 이번 명단에 없다고 알려 주었지만 아내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나왔다가 상심이 커 실신하고 만 것이다.

사실 내려오는 날도 “잠깐 연락만 전해주면 된다”고 마실 나오듯이 집을 떠났다. 아내는 그때 27살, 손도 변변히 잡아주지 못하고 3개월 된 딸 옥희의 볼만 한번 비벼주고 나왔을 뿐이다. 생사연락도 못한 채로 41년이나 흘렀으니 젊은 아내는 과부로 평생을 살아온 셈이다. 아내는 나를 기다리며 고맙게도 88년까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송환된 전사들 속에서 내가 있었다면 그 오랜 응어리가 조금이나마 풀렸을 텐데...

▲ 비전향 장기수 2차 송환 촉구 모임에서 10여명 되는 비전향 장기수들은 2차 송환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 : 박종린 선생]
▲ 비전향 장기수 2차 송환 촉구 모임에서 10여명 되는 비전향 장기수들은 2차 송환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 : 박종린 선생]

기다렸던 2차 송환은 2004년 정동영 통일부장관이 취임하면서 뭔가 이루어질 듯한 분위기가 되었다. 마침, 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에서도 강제전향은 위법이며 그렇게 이루어진 전향은 전향이 아니라는 판결도 나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05년을 지나면서 2차 송환 분위기는 급격히 시들해져 버렸다.

스치듯 만난 옥희, 눈물 속에서 헤어지고
“박종린 선생, 저기 잠시만...” 

6.15공동선언 7주년을 기념하는 민족통일 대축전 남측참가단이 귀환하려고 버스에 오르고 있던 참에 내 옆으로 북의 안내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리고 통제선 바깥에 있는 한 가족을 가리켰다.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흐느끼면서 내게 깊은 절을 하는 여인, 그 옆에 중년 남자, 그리고 아이 둘. 폐막식이 열렸던 평양 태권도 경기장에서도 내게 계속 눈길을 보냈던 그 여자였다. 아, 필경. 옥희 그리고 옥희의 가족인 게다. 59년 자는 얼굴에 볼 한번 비비고 헤어졌던 바로 그 딸이다.

눈물 속에서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옥희의 모습은, 연길감옥으로 아버지 면회를 가려고 옥수수를 싸던 어머니의 작은 어깨와 닮았다. 내가 떠나오는 날, 고구마가 담긴 도시락을 건네며 눈물짓던 아내의 눈매와도 닮았다.

‘모란봉 간첩단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던 날, 내 품에서 잠들 던 아내의 살 내음과 꼬물꼬물대던 옥희의 발가락이 떠올랐다. 전향하라는 고문을 받을 때는 “금방 돌아올거죠”라고 애처롭게 묻는 아내의 목소리와 옥희의 옹알이가 들렸다. 1차 송환 명단에서 배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언제 돌아올거예요”라는 물기 어린 아내 목소리와 옥희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발걸음을 비틀대며 손을 추어올리고 옥희 쪽으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옮기는데 “버스가 출발할 예정이니 빨리 탑승해달라”는 방송이 계속되었다. 1호 차는 조금씩 움직이기까지 했다. 영문을 모르는 우리 버스 일행들은 어서 올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모든 게 뿌옇다. 아버지 상여가 나가는 날, 어머니는 우리 어린 형제들을 앞세우고 에고에고 곡을 했다. 팔공산에서 네이팜탄으로 온통 불바다가 될 때 나는 엄마를 불렀다. 친구와 손을 잡고 무서워서 함께 울었다. 대구 교도소 망루 밑 징벌방에서 새벽이슬을 덮고 잘 때 아내의 분 냄새가 그리웠다. 떠나올 때 나를 꼭 잡아주었던 따뜻한 손이 그리웠다. 아내가 1차 송환자 무리에서 미친 듯 나를 찾다 쓰려졌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지팡이를 짚고 밤거리를 헤맸다. 소주도 들이켰고 내 운명을 욕하고 저주했다. 모든 게 뿌옇고 뿌열 뿐이다.

▲ 2007년 6.15선언 7주년 민족대축전 참가 당시 박종린 선생, 오른쪽은 당시 범민련 남측본부 이경원 전 사무처장 [사진 : 박종린 선생]
▲ 2007년 6.15선언 7주년 민족대축전 참가 당시 박종린 선생, 오른쪽은 당시 범민련 남측본부 이경원 전 사무처장 [사진 : 박종린 선생]

나는 2007년 6월 14일 6.15 공동선언 7주년 민족통일 대축전에 참가했다. 장기수 배려차원으로 대표단에 선정되어 평양에 가게 된 것이다. 1차 송환이 좌절되었지만 꿈에 그리던 북녘 땅 을 밟았다.

근 50년 만에 발을 디딘 평양은 놀랍고 장대했다. 전후에 평양은 잿더미였다. 평양시민이 42만이었는데 미군이 퍼부은 폭탄이 무려 43만 발이었다. 시민 한 명 당 폭탄 하나를 맞은 셈이었다. 그래서 내가 정전 후 소속되어 있는 부대는 사무실이 없어서 임시 막사나 토굴같은 곳을 이용했을 정도다. 그 당시 재건 삽을 올린 곳은 노동당당사, 최고인민회의 청사, 내각청사 정도였다.

평양에 발을 디딘 것은 6월 14일이지만 주석단 배치에 대한 입장 차로 떠나는 날까지 거의 행사를 하지 못하고 호텔 방에만 묶여있었다. 떠나는 날인 6월 17일에야 비로서 공식행사가 폐회식을 겸해 열렸다. 나는 평양체류 기간 중 필시 딸을 만나리라 기대했지만 분위기가 그러니 마음만 초조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는데 버스에 오르기 직전에야 얼굴을 본 것이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선생님 그리 우시면 몸 상해요” 라고 주변 사람들이 걱정을 많이 했다. 내려오는 길 내내 창밖에는 부슬비가 떠나질 않았다.

3,000만원 보증금으로 살아가는 요령을 익히고
나는 지금 인천 근처에서 살고 있다. 무안에선 2000년 9월에 올라왔다. 언젠가 이루어질 2차 송환을 가까이서 준비하고 싶었다. 마침 1차 송환자들이 올라가면서 두 선생이 함께 살던 과천의 집이 비게 되었고 남긴 보증금이 3천만 원이나 있었다. 덕분에 내가 그곳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보증금을 올려달라고 해서 봉천동 옥탑방으로 이사를 갔다. 계단 때문에 올라가기는 힘들어도 서울대 근처이고 젊은 학생들도 더러 찾아와 정이 많이 들었다.

두 해가 지나고 이곳도 보증금을 올려달라고 했다. 이 곳 저 곳 3,000만 원에 갈 수 있는 집을 알아보니 마침 부천 송내에 적당한 집이 있었다. 그래서 부천으로 이사해 지역 활동도 거들며 ‘민족21’과 ‘범민련 경인연합’고문으로 일을 했다.

이곳도 2년이 지났을 무렵 다시 세를 올려달라고 했다. 이때 나도 요령이 생겼다. 서울에서 조금씩 멀어지면 싼 집을 구할 수 있었다. 부평에서 겨우 보금자리를 구했고 여기서는 2년씩 네 번을 인상 없이 연장해줬다. 8년이 지나고서 주인집은 사정을 많이 봐줬다며 다음 계약에는 세를 올려달라고 했다.

돈을 늘릴 수 없는 나는 다시 서울에서 조금 더 먼 곳으로 이사를 했다. 마침 중국에서 조카들이 한국으로 나와 장사를 하게 되면서 함께 살게 되었다. 그들이 천만 원을 보태 지금은 보증금 4천만 원에 방 두 개 화장실 하나가 있는 다세대 주택의 한 층을 쓰고 있다.

▲ 거의 모든 일과를 이제는 침대에서 보낼 정도로 기력이 쇠했다 [사진 : 민병래]
▲ 거의 모든 일과를 이제는 침대에서 보낼 정도로 기력이 쇠했다 [사진 : 민병래]

나는 2017년 8월에 대장암 판정을 받았다. 고혈압과 당뇨병, 기관지, 천식까지 있는 상태다. 발병 초기에는 대장암 통증이 2~3시간 간격으로 와서 제대로 식사도 못했다. 다행히 지인을 통해 북에서 만든 약 ‘금당’ 30통을 구했고 이 효험 덕분인지 다소 좋아져 밥 먹는 게 편해졌다.

그렇지만 오늘도 암세포는 내 몸을 조금씩 갉아 먹고 있다. 기력도 하루하루가 다르다. 귀가 어두워져 대화도 힘들다.

두 개의 나라, 하나의 조국
"여기까지 남녘 동포들에게 남기고픈 얘기를 정리했습니다." 

남녘 동포들이 힘들게 일해 내는 세금으로 매달 69만원, 거기에다 요양보호까지 받고 있으니 돌아보면 남녘 동포들은 제게 선물이고 대한민국의 복지제도는 저를 지탱해주는 큰 힘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남녘 동포들에게 마음속 깊은 인사를 전합니다.

마지막 소원이라면 1차 송환 때 못 갔던 10여명 동지들과 판문점을 통해 북으로 가고 싶습니다. 가서 눈길만 주고 받은 외동딸 옥희 그리고 사위와 손주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어머니와 아내 묘소에도 참배를 하고 싶습니다. 고통만 안겨주었으니 그렇게나마 사죄를 드리고 싶습니다. 일본 감옥에서 고생하셨던 아버지 박승진의 묘소에도 술 한 잔 올리고 당신 자식도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고 고하고 싶습니다.

이 얘기들을 구술할 때 ‘남북연락사무소’가 폭파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역사는 희생을 먹고 나아간다고 하지만 가슴이 철렁했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길게 보면 가야 할 길로, 흘러가야 할 길로 가는 게 역사라 생각합니다.

▲ 침대에서 휴식을 취하는 박종린 거의 대부분 일과를 지금은 누워서 생활할 수밖에 없는 상황 [사진 : 민병래]
▲ 올해 88세의 박종린 대장암 투병 중인 그의 집에서 [사진 : 민병래]

저는 34년간 교도소에 있었습니다. 그저 지시를 전달하고 교도소 내 인권투쟁을 벌인 정도였습니다. 내게 내려졌던 34년은 분단이 안긴 과도한 형벌이고 양심과 사상을 옥죈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죽음과 함께 이런 야만과 형벌이 끝나길 소망해봅니다.

제 마음에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두 개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리고 통일코리아라는 하나의 조국이 있지요. 어서 하나의 나라가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1차 송환이 좌절되어 허망한 마음일 때 아내가 송환된 장기수 환영행사에서 미친 듯 나를 찾아 헤매다 쓰려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저 죽고 싶었습니다. 그때 한용운 선생의 글이 제 마음을 붙들어주었습니다. 이 글을 나누면서 제 얘기를 마칠까 합니다.

<나룻배와 행인>이란 시입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나를 흙발로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오시면, 나는 바람에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말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민병래 작가
1999년에 광고대행사 ‘황소와 나비’를 창업하여 현재까지 운영중이다. 1998년부터 문해교실과 다문화도서관을 운영하는 시민단체 ‘푸른’의 이사를 맡고 있고 2000년에 <호암미술관에 있는 아름다운 우리 문화재>(파란자전거 출판)을 썼다. 2015년부터 군함도의 작가 이재갑 사진가와 함께 생각하는 사진모임 '포피엔스'에서 활동하고 있고 2017년 공동전시 ‘마포, 사진을 품다’에 참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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