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철 소장의 ‘민간인 희생자로 보는 한국전쟁 전후사’(9)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은 “비무장 민간인을 재판 없이 살해”한 전쟁범죄라는 사실, 희생자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니라 가해자들이 갖고 있던 이데올로기 때문에 죽어갔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한국전쟁 전후 이승만의 좌익 척결은 실제 1950년 8월이면 모두 마친다고 볼 수 있다. 형무소사건과 국민보도연맹사건만으로도 30만 명 가까이 살해했다. 그럼에도 1950년 9월 국군의 서울 수복 후 다시 처단 대상 55만 명을 만들어냈다. 100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 실상을 추적해 본다.[편집자]

1950년 9월15일 5만의 미 해병대가 인천에서 상륙작전을 벌이던 때 낙동강 전선 모든 곳에서 적진을 뚫고 진격하라는 명령이 동시에 내려왔다. 이름도 무시무시한 ‘무제한 공격명령.’ 하지만 진격은커녕 더욱 거세진 인민군의 공격 앞에서 물러나야 하는 형편이었다. 인민군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또는 최후의 발악인 듯 보이는 공격을 퍼부었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해 봐야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면 전쟁은 승리로 끝날 것이라는 판단을 했을 수 있었고 실제 인천상륙작전을 벌임에 있어서 미군측이 가장 두려워했던 결과이기도 했다. 9월22일경 인민군의 공격은 갑자기 중단되었다. 후퇴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뒤늦게 이를 눈치 챈 국군은 24일에야 진격을 본격화했다.

전쟁 발발 3일째 되는 새벽 가장 먼저 안전하게 피난길을 떠난 이승만은 피난처에서도 마치 서울에 있는 것처럼 ‘그대로 있으라’며 국민들에게 거짓 방송을 했다. 최고 지도자의 말을 믿은 국민들은 3개월 동안 점령군의 통치 아래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고통을 받았다. 수복을 눈앞에 둔 대통령은 이제라도 국민에게 사과하고 용서와 화해의 손길을 내밀 차례였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정반대였다. 국민보도연맹사건에 이어 다시 한 번 그가 과연 정당하게 선출된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는지 의심스러운 대량학살사건이 연이어 벌어졌다.

인민군 점령기 점령행정기구로 인민위원회 등이 선거로 구성되었다. 이때 당선된 군 인민위원이 3878명, 면 인민위원이 2만2314명, 리 인민위원이 7만7716명이었다. 국군 수복 후 이들은 물론 그 가족들, 의용군에서 돌아 온 청년들의 가족들도 부역자에 포함되었다. <경찰10년사> 등 각종 정부자료에 따르면 인민군 점령 불과 3개월 만에 55만 명의 반국가 사범이 새로 생겼다. 잠시 생각해보자. 해방 후 전쟁 직후까지 어림잡아도 국민보도연맹원 등 최소 40여만 명에 이를 좌익활동 의심 인사들이 집단 학살당했다. 전쟁을 빌미로 반정부 인사들을 깨끗이 청소했던 것이다. 그런데 불과 두 달 만에 55만이 새로 생겼다. 그리고 이승만 정부는 이들을 회유하거나 용서하지 않았다. 죽이거나 감옥으로 보냈고 죽을 때까지 괴롭혔다.

1950년 10월6일부터 10월25일까지 고양 금정굴에서 200여 명의 주민이 학살당했다. 같은 해 11월8일 검사 장재갑이 학살 현장을 방문해 피해 사실을 확인했지만 2009년 형사사건기록이 공개되기 전까지 국가가 저지른 모든 범죄사실은 은폐되었다. 사건 발생 45년만인 1995년 최소 153구의 유골이 유족들에 의해 발굴되면서 이승만 정부가 말한 55만 명 처리과정의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희생자 이봉린(1903년생)은 일제강점기 금융조합 직원이었으며 해방 후 마을 구장 일을 보았다. 1950년 6월28일 인민군이 고양지역을 점령하자 피신했지만 일주일 뒤 농사일이 염려되어 돌아왔다가 농지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이 때문에 수복 후 부역했다며 고양경찰서로 끌려가 1950년 10월9일 금정굴에서 희생당했다. 1933년생인 아들 이씨는 학살 당일 끌려 나가는 희생자를 보았으며 학살 당일 금정굴 현장을 방문하여 희생자 47명 중 생존자 이경선씨를 굴 밖으로 꺼내는 모습도 목격했다.

▲ 일산금융조합 동료들이라고 한다. 뒷줄 오른쪽이 이봉린 선생이고 앉아 있는 이가 박중원 선생이다. 사진 중 두 분이 금정굴에서 희생되었다.

서오릉 마을에서 태어나다

이봉린은 1905년 서오릉 앞인 고양군 신도면 용두리에서 부친 이윤태와 모친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큰아버지는 서오릉을 관리하는 능참봉의 벼슬에 있었다고 한다. 아들 이씨는 부친이 어려서부터 총명해서인지 학교에 다니지 않았음에도 홀로 한자와 숫자를 익혔다고 했다. 당시 서울과 근접했던 고양군 숭인면 용두리 지역 사회의 분위기로 보아 집안이나 마을의 누군가 가르친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데 이에 대해 기억하는 것이 없다고 했다.

일산금융조합에서 일하다

1918년 온 가족이 갑자기 중면 일산리로 이사 오게 되었다. 당시 살고 있던 용두리 마을에 열병이 돌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사 와서 자리 잡은 집터는 오늘날 농협이 있는 곳으로 그 전까지 일산금융조합이 있던 곳이었다. 한자와 숫자를 일찍 깨우쳤던 이봉린은 어린 나이에 일산금융조합에 급사로 취직할 수 있었다. 일산금융조합은 고양군 금융조합 산하조직이었는데 당시 고양금융조합은 지금의 서울 신당동에 있었다고 한다.

조합에서 주로 한 일은 금전출납이었다. 이봉린은 한복을 즐겨 입었는데 특별히 민족의식이 강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1932년 이계선씨(1910년생)를 아내로 맞았으며, 1936년경 현재 아들 이씨가 살고 있는 곳으로 가족들이 이사했다. 당시 새로 지은 집은 열다섯 칸으로 일산에서도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컸었다고 한다. 그 동안 살던 집터에는 일산금융조합이 옮겨왔다.

해방 직전까지 일산금융조합에 다녔다고 하니 30년 가까이 근무한 것이었다. 조합에 다니면서 동생의 명의로 대출 받아 일산역 앞 후곡마을에 있는 논 2800평을 샀다. 당시로서는 수확량이 많았던 최고의 논이었다고 한다. 그 외에 금정굴 아래쪽에도 논을 갖고 있었다. 이봉린은 금융조합 일을 마치면 고봉산 등에서 벌목 일을 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금융조합에서 발생할 수 있는 화재 때문이었는지 다른 일보다 소방대원으로 열심히 활동했다고 한다. 당시 소방대장은 측량기사였다는 한창석으로 전쟁 당시 국군 수복 후 금정굴에서 이봉린과 같은 날 희생당한 인사였다. 당시 금융조합에는 금정굴에서 함께 희생된 직원이 박중원 외에 이규봉이 있었다. 이봉린의 사진 속에 등장하는 금정굴 희생자들은 본인을 포함해 한창석, 이규봉, 박중원 등 모두 네 명이다. 한창석(1895년생)은 일제시기 측량기사였으며 해방후 대서업을 했다. 이규봉(1895년생)은 일산금융조합 부이사였다.

▲ 고봉산에 오른 일산 의용소방대원들이 기념 촬영했다. 아랫줄 오른 쪽이 이봉린 선생이고 가운데 줄 중앙에 안경 쓴 이가 소방대장인 한창석 선생이다.

해방과 전쟁

해방 후 일본이 패망하자 따라서 금융조합도 없어지게 되었다. 이봉린은 농사에 전념하면서 일산리 2구 구장으로 마을 일을 보게 되었고, 마을 공동기구였던 농악 악기들을 행랑채에 보관했다고 한다. 해방 후 다른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일제 때부터 해왔던 소방대 활동은 계속했다. 그때도 소방대장은 한창석이었다고 한다.

전쟁이 나자 이봉린은 인민군의 점령을 피해 서울 당인리 발전소 부근에 살던 누이집으로 피난을 갔다. 한강교 폭파로 이미 한강을 통한 피란은 불가능할 때였다. 일주일 정도 지내다 돌아왔는데, 당시 가뭄이 심했던 터라 피난으로 때를 놓쳤으므로 내리는 비를 보고 모를 내러 왔던 것이라고 한다.

금정굴 방면에 있던 논에서 모를 내던 중 일산리 임시인민위원회에 불려 나갔다. 인민위원회는 구장을 봤다는 이유로 일을 하라고 요구했고 할 수 없이 농촌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주로 한 일은 벼 이삭 등을 세는 일이었는데 이는 세금 공출을 위한 기초 자료를 모으는 것이었다. 9월에 수복되었으므로 실제 공출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들 이씨는 공출량을 계산한다고 나갔다 온 부친이 옷에 흙을 잔뜩 묻히고 들어오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아, 금정굴

그렇게 인민군 점령 3개월이 지나고 인천상륙작전 후 행주로 미군이 들어왔다. 상륙작전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은 작전 전 이미 알려져 있었다고 했고 인민위원회는 해체되었다. 적극적으로 부역했다고 생각한 주민들은 일찍부터 북으로 향했다.

1950년 9월20일부터 28일까지 수복지역과 미수복지역이 공존했다. 능곡과 풍동이 그 경계였는데 미수복지역은 무정부상태와 다름없었다. 미수복지역의 청장년들은 물러가는 인민군 세력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상태인데다 그대로 있다가 수복된다면 인민군 점령지 부역자라는 낙인을 지울 수 없게 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수복지구로 피하는 것이었다.

미군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이봉린은 일산으로 피신 왔던 둘째 처남과 함께 경의선 철로를 따라 능곡으로 무사히 빠져나갔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렇게 나가려다 풍동에서 인민군측에 잡혀 희생당했으므로 무사히 이를 통과한 이봉린과 그의 처남은 운이 좋은 경우였던 것 같다. 하지만 이후 그 운은 처남에게만 국한되었다. 처남은 무사히 서울로 갔으나 이봉린은 농촌위원장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수복지구 능곡지서로 잡혀가게 되었다. 무정부 상태였던 일주일 동안 미수복지구에서는 인민군측이, 수복지구에서는 경찰과 치안대가 주민들을 체포했다. 여기로 가나 저기로 가나 이 시기에 죽어 나가는 것은 민간인들뿐이었다.

지서로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처가 능곡까지 밥을 날랐다. 일주일 정도 뒤 일산의 고양경찰서 유치장으로 옮겨졌으며, 밥을 계속 날랐으나 직접 면회는 시켜주지 않았다. 고양경찰서에 갇혀 있는 동안 매를 몹시 맞았다고 한다.

1950년 10월9일에도 밥을 가지고 갔으나 문산으로 심사받으러 간다며 밥을 받지 않았다. 얼마 뒤 아들 이씨는 유치장에서 나온 부친이 집 앞 논길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았다. 정오가 다 된 데다 47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끌려나왔으므로 읍내 주민들 대부분이 이 장면을 목격했다.

김상용 노인은 묶여 가는 아들 김석환을 멀리서 따라가다가 금정굴 학살 현장을 목격하고 이 사실을 마을에 알렸다. 마을 사람들은 멀리서 나는 총소리를 들었지만 조금 전 경찰서 유치장에서 끌려나온 주민들이 살해당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모두 크게 놀랐다. 김 노인은 “심사는 무슨 심사요? 금정굴에서 다 죽였어요.”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이렇게 외치면서 이봉린의 집까지 왔다. 그나마 시신이라도 수습하러 갈 수 있는 집은 여기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산으로 갔을 것으로 믿고 있던 가족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희생자의 동생 이삼린과 마을 사람들 7명이 시신을 옮길 우마차와 밧줄, 사다리를 준비하고 금정굴로 향했다. 현장에 도착한 시간은 낮 2시 즈음. 산 능선에 있던 금정굴 주변에는 탄피들이 굴러다녔고 곳곳에 희생자들이 흘린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굴 안에서는 목숨이 붙어 있던 사람들의 신음 소리가 가득했다. 10미터 깊이가 넘는 굴 안을 살펴보는 순간 어디선가 “살려달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은 생각할 틈도 없이 밧줄에 사다리를 묶어 굴로 내려 보냈다. 허겁지겁 한 사람이 사다리를 타고 줄을 잡고 올라왔다. 중산말에서 기름장사를 하던 이경선이라고 했다. 죽다 살아난 그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옆 사람이 총을 맞고 굴로 떨어졌고 함께 묶여 있던 자신도 떨어졌는데 총알이 얼굴을 스쳤을 뿐이어서 죽지 않고 있었다고 했다. 5명을 한 사람씩 맡아서 1미터 뒤에서 쐈다고 하니 이씨를 담당했던 경찰이나 의용경찰대가 차마 정조준을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씨는 함께 총살당한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몇 마디 남기고 급하게 현장을 떠났다. 잡히면 또 죽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씨는 집으로 가지 않고 서울로 떠났으며 90년대 사망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일산에 발을 디디지 않았다고 한다.

이씨가 떠난 뒤 희생자의 동생과 주민 한 사람이 금정굴을 내려가 시신을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장소가 좁아 시신을 옮길 수도 없었고 어두워서 성냥으로는 식별도 할 수 없었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이 내는 신음소리였다. 금정굴 안에서 두 사람이 시신들 외에 발을 디딜 수 있는 곳이 없었으니 여기야 말로 지옥이었다.

살아남은 사람들

고양경찰서와 의용경찰대, 태극단, 치안대의 만행은 이봉린의 죽음에 그치지 않았다. 가재도구는 물론 뒤뜰에서 기르던 20마리의 닭과 텃밭의 무와 배추까지 뽑아갔다. 이웃에 살던 형사의 도움으로 그나마 죽지 않을 만큼의 먹을거리는 남았지만 아들 이씨에게는 견딜 수 없는 참혹한 기억이었다. 약탈해 간 자들은 얼마 전까지 부친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봉린의 시신을 확인하지 못했던 유족들은 이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고, 고양경찰서와 고양군 시국수습대책위원회의 이러한 약탈행위가 무엇을 의미했는지 알 수 없었다. 비록 집안 친인척들의 힘으로 버텼다지만 상황이 더 나빠질 경우 남은 가족들조차 살려두지 않으려 했던 시도였음을 유족들이 알 턱이 없었다.

이듬해 아들 이씨는 더 끔찍한 일을 겪을 뻔했다. 가장을 잃고 생활고에 시달리던 장남에게 큰돈을 벌게 해 주겠다며 접근한 사람이 있었다. 먼 친척뻘 되는 그는 무슨 일인지 일단 부딪쳐 보면 안다고 했다. 그의 소개로 찾아 간 곳은 서울에 있는 한 학교 운동장이었고 여기서 며칠 동안 텐트 생활을 해야 했다. 운동장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군인이었고 가끔 트럭에 탄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군가를 부르며 들어왔다.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니 우리 군가가 아니었다. 며칠 동안 살펴보고 판단해 보니 이곳은 북파공작원 훈련소였던 것이다. 아들 이씨는 그날 근처에 있는 친척 집에 가서 갈아입을 옷가지를 얻어 오겠다는 핑계를 대고 나온 뒤 그대로 도망쳤다. 이들이 찾아올 것 같으니 당장은 집으로 갈 수 없어 이곳저곳을 하염없이 돌아다니며 피해 다녀야 했다. 예상했던 대로 군 부대에서 여러 차례 집을 찾아왔다는 사실을 나중에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대한민국이 아버지를 죽여 놓고 고아가 된 그 아들을 북파공작원으로 이용했던 사례를 세 건 더 알고 있다. 포천과 홍성, 그리고 고양의 또 다른 유족이다. 육군 정보국은 고아처럼 밑바닥을 전전했던 이들에게 돈 벌이를 미끼로 던졌고 이들은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겨가며 전선을 넘나들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영화 <실미도>의 한 장면이기도 하다. 국군 수복 후 부역했다며 학살당한 아버지를 둔 684부대 3조장 강인찬(영화배우 설경구 역)은 아버지를 죽게 만든 자라며 “김일성의 목을 따오겠습니다!”라고 외친다. 실제 아버지를 죽인 자는 이승만 정부였는데 말이다.

잠들지 못한 뼈들의 증언

이후 무려 40여 년 동안을 말도 꺼내지 못하고 지냈던 유족들이 군사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 이행기에 접어든 시점에서야 입을 열기 시작했다. 1993년 유족들은 고양시의회, 시청, 국회, 청와대, 경찰청, 경기도 등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혀 달라며 안 가 본 곳이 없었다. 그런데 이들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그런 사실을 확인해 줄 수 없다고 했으며 심지어는 유골이라도 가지고 와야 믿겠다고 했다.

1995년 9월 45주기 제3회 위령제를 지낸 유족들이 발굴을 시작했다. ‘유골을 보여 달라니 보여 주지! 유골이 나오면 이 억울한 사연을 인정할 거야’라고 생각했다. 발굴 5일 만에 10미터 깊이 어두운 수직 동굴 속에 감춰졌던 유골이 쏟아져 나왔다. 이후 일주일 만에 출토된 유골은 153구였다. ‘153’은 온전히 발굴된 오른쪽 대퇴골의 수였다. 하지만 왼쪽 대퇴골의 수가 137개였으므로 이는 오른쪽보다 16개가 적은 것이었다. 이 16개의 차이는 45년의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흙이 된 대퇴골의 수를 의미하기도 했으므로 오른쪽 대퇴골 역시 16개 정도가 훼손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유골만으로도 발굴된 오른쪽 대퇴골 수 153에 16을 더한 수, 즉 169명의 희생자를 추정할 수 있다. 관련 <형사사건기록>은 희생자 수를 180~200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봉린이 끌려간 날은 10월9일로 학살이 시작된 초기였다. 발굴 말기에 출토된 유골 중에 그의 것이 섞여 있었을 것이다.

▲ 1995년 10월 금정굴에서 출토된 유골과 유품. 10대의 두개골과 소녀의 댕기머리는 희생자 중 미성년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서울대 법의학과 이윤성 교수의 DNA조사 결과 희생자 중 10%는 여성으로 나타났다.

여전히 소외된 죽음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결과 불법학살 사실이 규명되었음에도 대한민국은 여전히 자신들의 전쟁범죄 행위를 인정하려하지 않는다. 진실화해위원회가 발굴한 유해의 안치는 물론 금정굴에서 발굴된 유해도 안치를 기피하고 있다. 역사적 교훈으로 삼는 것도 회피하니 특별법에 의해 만들어진 제주, 거창, 노근리 외에 전국 어디에도 정부나 지자체가 설립한 역사관 하나 찾을 수 없다.

보훈단체의 눈치나 보면서 소극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 것은 고양시도 마찬가지이다. 인권과 평화의 도시를 만들겠다면서, 국제평화기구를 유치하겠다면서 정작 200여 명의 인권이 유린당한 현장, 한국전쟁의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금정굴 현장은 방치된 어린이 놀이터만도 못하게 흉하게 남아있다. 법의학적 감식을 위해 서울의대로 떠났던 유골을 다시 현장으로 안치하겠다는 것도 불법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이장한 것이니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주장이다. 대안이라며 제시한 것은 너무 치욕스러운데다 또 다른 약자를 밀어내는 방안이어서 이 자리조차 밝히기 민망하다.

사건 당시 열일곱이었던 아들 이씨는 벌써 팔순이 넘은 지 오래이다. 심장수술로 몸도 많이 약해졌다. 이제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유해안치’ 하나밖에 없다. 아들 이씨는 평화공원을 만들겠다던 고양시장의 공약을 믿고 있다가 6년의 세월을 빼앗겼다. 이제라도 직접 나서겠다는 각오를 다지지만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하늘만이 알 뿐이다.

▲ 아들 이병순씨가 66년 전처럼 아버지 이봉린 선생이 금정굴로 끌려가던 일산시장 길목을 바라보고 있다.

 

*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금정굴인권평화재단 부설)은 서울 태생으로 서울대 심리학과를 다닌 뒤 인천과 구로, 영등포 지역 노동운동과 고양지역 시민운동에 참여했다. 또 금정굴 사건 등 과거사 진상규명 활동에 참여해 2004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006~2010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조사팀장으로 활동했다.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과 홀로코스트 등 제노사이드의 공통점을 비교,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멈춘시간 1950>, <전쟁범죄>,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 <국민은 적이 아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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