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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가요사에서 노래를 가장 잘하는 가수를 한명 꼽으라면 60대 이상에서는 아마 ‘남인수’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고음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와 정확한 발음, 남인수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그 청아한 음색에 모든 시름을 한꺼번에 다 잊게 만드는 것 같다.1962년 남인수가 세상을 떠났을 때 서울시내 기생들이 소복을 입고 나와 그의 마지막을 배웅했다는 일화는 지금도 사진으로 남아 남인수의 인기를 실감케 한다. 이렇게 장안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가수지만 그에게는 친일파라는 지울 수 없는 또 하나의 굴레가 있다. 일제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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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진 현장기자
2017.09.20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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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4년 서독을 방문하였을 때 뤼브케 서독 대통령과 기술 원조 협약을 체결하였다. 이에 앞서 한국 정부는 광업 기술을 향상시킨다는 명목 아래 1963년 12월 서독 석탄광산협회와 협정을 맺었다.당시 한국은 박정희의 경공업 육성책으로 인해 농촌은 붕괴되고 도시에서는 실업과 외화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서독의 부족한 노동력과 한국의 실업 및 외화부족 현상이 만나 이뤄진 결과가 한국 노동력의 서독 광산 파견이었다.최초 서독 광산 파견은 3년 계약으로 500명을 모집하였다. 당시의 실업난과 한 달 160달러의 높은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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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진 현장기자
2017.08.23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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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공화당의 박정희는 3선 개헌을 통해 무리하게 정권을 연장하기로 한다. 이에 맞선 신민당은 ‘40대 기수론’을 앞세운 김대중, 김영삼, 이철승이 경선을 벌였는데 김대중이 대선 후보로 뽑혔다. 이듬해인 1971년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는 박정희에게 아깝게 패하지만 7대 대통령 선거는 당시 부정행위 논란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며, 이른바 지역감정을 자극해 영호남 갈등을 촉발시킨 문제의 선거로 남아 있다.이렇게 어렵게 선거에서 승리한 박정희는 남북관계에서 갑작스런 유화정책으로 남북 적십자회담을 진행하고 1972년 ‘7.4남북공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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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진 현장기자
2017.08.02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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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포크계에 살아있는 전설로 70이 넘은 나이에도 노익장을 과시하며 음반 발매 등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밥 딜런. 만약 밥 딜런이 한국에 태어났다면 가수로 활동을 할 수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절대로 가수로 활동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노랫말이 반전과 평화를 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청년시절 반전 시위 참여 탓일까? 절대 아니다. 그의 목소리는 박정희의 유신시대 표현으로 말하면 ‘창법미숙’이다. 창법미숙이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 잣대로 가수들을 재단하고 음반에 불법 낙인을 찍던 시대. 한국 포크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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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진 현장기자
2017.06.28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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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운동권 노래의 한계는 선동적이고 투박한 직설적 표현 등으로 대중이 받아들이기에는 부담스럽다는 것이었다. 실제 학생운동권에는 안치환보다 노래를 더 잘하는(?) 가수들이 많이 있었다. 고려대의 김영남, 성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우위영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노래만 부르지 않고 정치와 일상생활 속으로 들어가면서 그 시대의 노래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시대를 지나 계속 노래를 부르는 몇몇 가수들이 있다. 손병휘, 이정렬, 이지상 등이 그렇다. 이 가수들은 일부 고정적인 팬층을 확보하고 왕성히 활동하고 있지만 그 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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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진 현장기자
2017.06.21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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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을 노래하고 그 노래를 음반으로 낸다는 것이 감옥에 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대한민국에서 20년 전에는 충분히 가능했던 일이다.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사회 각층에서 쏟아져 나온 사회개혁 목소리는 자신들의 이해와 요구에 부합하는 조직들을 만들어 나가면서 정부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조직 규모나 세력 면에서 가장 컸던 게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즉 전대협이었다. 87년 항쟁의 기폭제이자 주도체로 승리를 이끌어낸 힘은 당시 대학생들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대학생단체는 정부로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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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진 현장기자
2017.06.14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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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은 한국사회 전반에 억눌렸던 각계각층의 문제들이 봇물처럼 수면 위로 올라오는 계기가 되었다. 교육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교육 현장은 정부 방침을 앵무새처럼 하달하는 것은 물론, 지옥같은 입시경쟁과 체벌이 일상이었고, 사학계는 비리마저도 당연시하는 풍토였다. 이처럼 비교육적인 각종 비리와 모순이 가득했던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교문을 박차고 나와 ‘참교육’을 외치며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을 결성하기에 이르었다. 교육자가 노동자라는 등식은 성립될 수 없다는 권위적인 군사정권의 방침은 전교조를 불법단체로 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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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진 현장기자
2017.06.07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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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음악 시장은 방송에서는 ‘조용필’과 ‘전영록’이 모든 음악을 섭렵하면서 음반시장을 장악해 가고 있었고, 여기에 트로트 군단이 강력한 대항군으로 자리잡아 방송시장에 더 이상의 새로운 음악이 들어갈 틈은 없었다.군부독재가 판치던 80년대 젊은이들은 보여주는 문화이외에 새로운 문화를 열망했고 그 열망은 영미 팝이 라디오에서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 음악 시장에 신촌을 중심으로 새롭게 언더그라운드의 스타들이 나오기 시작했다.‘가왕 조용필’에 대항할 정도의 노래 실력으로 무장한 ‘가객 김현식’이 라이브 무대를 중심으로 젊은이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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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진 현장기자
2017.05.31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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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음반시장에서 LP 붐이 일고 있다. 사실 LP 붐이라고 해도 음악을 좋아하는 매니아층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어 붐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은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매니아 사이에서 오랫동안 회자되는 음반이 하나 있다. 대한민국 대중음악 최초의 여성 싱어송라이터라고 불리우는 방의경의 음반이다. 혹자는 ‘있다’, 혹자는 ‘없다’고 말이 오가면서 음반 한 장에 수백만 원의 고가에 거래되는 초희귀 음반이었다.그러나 최근에 이 희귀 음반이 새롭게 복각되어 그동안 음반을 살 수 없었던 매니아들은 그녀의 음악을 쉽게(?) 구해 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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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진 현장기자
2017.05.24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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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란 이름이 거론되는 것조차 가요계에서 금기시되던 때가 있었다. 볼온한 가수의 대명사처럼 불리던 김민기. 그러나 사실 김민기의 음악을 들어보면 그가 불온한 인물(?)이라고 느낄 만한 가사나 음절은 없다. 이것이 필자만의 생각일까? 그러나 김민기는 저항가수의 기수가 되었고, 그의 모든 노래에는 금지곡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김민기의 첫 음반은 ‘도비두’란 이름의 두엣을 결성해 발표한 음반에 수록된 ‘친구’가 최초였다. 그리고는 여세를 몰아 1971년 양희은의 1집에서 작사와 작곡, 기타까지 연주하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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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진 현장기자
2017.05.17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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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와 시민단체들이 행사를 시작할 때 정부의 국민의례와 다르게 치르는 의식이 민중의례인데 여기서는 애국가 대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다. 이런 재야의 민중의례 의식은 1980년대부터 공식화되었고 각종 민중의례의 상징인 임을 위한 행진곡은 노동자, 농민, 학생들의 또 다른 애국가로 불렸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애국가를 대신해 불린 배경에는 애국가의 작곡가인 안익태가 친일파라는 이유에서 친일파가 만든 애국가가 대한민국을 대표할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있기도 했던 것 같다. 실제로 애국가의 모태가 되는 안익태의 ‘한국환상곡’이 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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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진 현장기자
2017.04.12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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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70년대 바다 건너 미국에서 시작한 히피문화는 당시대 젊은이들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히피문화란 기성사회의 통념과 제도, 가치관을 부정하고 인간성의 회복과 자연으로 귀의 등을 주장했던 일련의 사회운동으로 영단어 해피(happy)에서 그 어원을 찾기도 한다.히피문화가 생겨난 배경 중 하나는 당시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 전쟁과 J. F. 케네디, 맬컴 엑스, 마틴 루터 킹 같은 미국사회의 상징적 인물들의 암살과 관련이 있다. 또한 1950년대 완성된 미국식 소비 자본주의에 대한 반발에서도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히피문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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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진 현장기자
2017.03.29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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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한국 정치사에서 30여 년간 지속돼 온 군부독재가 일단락된다. 혹자들은 김영삼의 문민정부가 1990년 인위적 정계개편을 통한 야합으로 탄생하였고 노태우 정부를 승계했다는 점에서 군부의 완전 종식으로 보기 어렵다는 평가를 내리긴 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80년대 민주화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던 김영삼 정부의 출범은 이후 김대중 정권 같은 온전한 의미의 정권교체는 아니었다고 해도 군부통치 시대를 마감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김영삼 정부의 출범은 노태우 군사정부의 뒤를 이었다는 점에서 의심의 눈초리와 함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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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진 현장기자
2017.03.22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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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7대 대통령 선거는 한국사에서 매우 중요한 분수령이 되는 선거였다. 우선 야당에서 40대 기수론을 내건 김대중이 이후 김영삼과 함께 야권의 쌍두마차가 되는 과정이었고, 3선을 노린 박정희는 온갖 부정선거로 간신히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고는 더 이상의 대통령 직접 선거를 금지하는 계기가 됐다. 사회적으로는 영호남 갈등의 불씨를 가져왔다. 김대중 개인에게는 사고와 납치, 연금과 고문 등 고난의 시작을 알리는 때였다.대통령 선거가 있기 2년 전인 1969년 박정희와 공화당은 박정희 대통령의 3선을 가능케 하기 위한 3선 개헌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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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진 현장기자
2017.02.22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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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청량리588’이라는 사창가는 과거 동대문구 전농동 588번지 주변에 성매매 업소들이 밀집해 있어 그렇게 불리게 됐다. 사창가와 역전은 항상 같이 따라다닌다. 서울의 대표적인 사창가였던 영등포, 청량리, 신촌, 회현동 등은 서울의 기차역이 있던 장소다. 지방도 이런 사정은 비슷했다.그런데 서울지역 사창가의 일부는 기차역뿐 아니라 대학가와도 가깝다는 점이 특이하다. 고려대가 있는 종암도 주변의 미아리, 연세대와 이화여대가 있는 신촌, 서울대가 있는 신림동이 그렇다. 청량리588은 대학생들이 강촌, 대성리 등 당시 유명했던 M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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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진 현장기자
2017.02.08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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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전쟁 중 가장 비도덕적 전쟁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 베트남 전쟁이다. 베트남은 19세기 프랑스의 침략으로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베트남 내 민족주의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고 공산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1930년에 결성되었다.이후 일본의 침략으로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간 베트남은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면서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자 베트남 독립연맹인 베트민(Viet Minh)을 결정하여 전국적인 봉기가 일어나게 되었다. 베트남의 독립을 원치 않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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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진 현장기자
2017.02.01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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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 이후 인류의 최고 에너지원은 화석원료였다. 석탄으로 시작된 화석원료의 사용은 20세기 들어오면서 석유로 대체되었고 석유는 지금까지도 인류 최대의 에너지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석유를 생산하는 국가는 소위 말하는 오일달러라 불리며 석유 판매로 인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고, 최대의 석유 생산량은 자랑하는 중동은 전 세계의 관심지역으로 떠올랐다.산업화가 진행될수록 석유의 사용량은 늘어가고 산업생산에서 석유의 의존도는 날로 높아지고 있다. 그래서 각 국가들은 자국의 석유량을 늘리기 위해 자국의 영토와 영해를 개발하거나 타국의 석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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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진 현장기자
2017.01.11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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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아파트 공화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9년 주거조사에서 아파트 비율은 5.2%에 불과했던 것이 2012년 아파트 비율은 무려 47%로 올랐다. 그리고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주거 형태가 대부분 아파트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아파트 비율이 50%가 넘어갈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한국인의 의식조사에서 중산층의 기준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월 소득 500만 원 이상에 2000cc급 이상의 차를 몰고 통장 잔액 1억 이상에 필수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30평대 아파트를 담보 없이 가지고 있어야 중산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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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진 현장기자
2017.01.04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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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12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은 정권의 부도덕성을 타계하기 위해 국민들의 관심을 소위 말하는 3S(Sex,Sports,Screan)로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 대표적인 사업이 올림픽 유치였다.1980년 9월 체육관 선거로 11대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가장 먼저 한 사업이 올림픽 유치였다. 80년 12월 올림픽유치위원회의 올림픽 개최지 신청 마감 4일 전에 대한민국 서울은 유치신청서를 제출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81년 2월 체육관 선거로 12대 대통령에 정식 취임한 전두환은 본격적으로 유치를 위한 각종 사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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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진 현장기자
2016.12.28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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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6월 항쟁은 신군부의 종말을 고한 동시에 한국사회에서 절차적 민주주의의 완성이라는 의미를 가져다줬다. 또한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 농민, 여성이 사회의 중심으로 부각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87년을 시작하는 1월, 서울대 학생인 박종철씨가 고문으로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처음에는 박종철씨의 죽음을 은폐하기 위해 화장할 계획이었으나, 당시 부장 검사가 사체보존명령을 내리고 1월 15일 한양대에서 사체를 부검한다. 부검 도중 온몸에 피멍이 들고 엄지와 검지 간 출혈 흔적과 사타구니, 폐 등이 훼손돼 있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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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진 현장기자
2016.12.21 1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