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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도시를 경영하는데서 가장 중점을 둬야할 분야는 바로 인재양성과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기관의 설치이다. 모든 생각과 훌륭한 계획과 기획은 사람이 하는 것이며 그것을 완성하는 것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알파고 시대라고 아무리 떠들어도 인재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진리는 절대 불변이다.정조의 치적 가운데서 가장 먼저 뽑아야 할 것은 규장각의 설치이다. 정조는 1776년 3월10일 즉위하면서 가장 먼저 규장각 설치를 명하여 9월25일 창덕궁에 완공을 보게 되었다.규장각은 역대 왕들의 친필·서화·고명(顧命)·유교(遺敎)·선보(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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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호 소장
2016.08.05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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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성건설 비용정조는 1789년 7월11일 장헌세자의 원침을 이전하기로 하고, 4일 만인 15일에 수원의 읍(邑) 소재지를 전격적으로 팔달산 동쪽으로 옮겼다. 그리하여 양주 배봉산의 장헌세자 원침을 수원부 구읍치로 옮기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구읍치에 있던 주민들의 가사(家舍)와 전답에 대한 보상도 이루어졌다. 보상은 민가 319호에 총 2417칸으로 원가 4818냥에 4394냥을 더 주어 총합 9212냥이 들었다. 그리고 원침조성 등을 포함한 총 경비는 돈이 18만4600여 냥, 쌀이 6320석, 목면이 279동 남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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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호 소장
2016.07.21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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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은 숙지산과 여기산 두 산에 각각 2곳, 권동에 1곳 등 모두 다섯 군데에서 채취하였다. 그러나 공사 중 팔달산에서도 석맥을 발견하여 서쪽 성은 제자리에서 캔 돌을 사용하여, 돌을 캐낸 곳은 모두 6곳이 된 셈이다.그중에서 숙지산 돌은 8만1100덩이, 여기산 돌은 6만2400여 덩이, 권동의 돌은 3만200여 덩이, 팔달산 돌은 1만3900여 덩이 등 모두 28만7600여 덩이가 축성에 소요되었다.석맥이 있는 논과 밭은 국가에서 매입하고 이곳에 석수를 투입하여 돌을 떠내었다. 석맥을 잘 골라 결을 살펴 정으로 구멍을 파고 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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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호 소장
2016.07.15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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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 생산과 유통 기반시설한편 정조는 화성을 자급자족적인 도시로 성장시키고자 농업생산기반 시설을 건설하였다. 제일 먼저 1795년에는 만석거를 조성하고 이 저수지를 활용하여 대유둔을 조성하였다. 정조는 농민들의 이로움으로 수리(水利)만한 것이 없다며 만석거를 만들기 전까지는 황폐한 땅이었는데 이제는 가뭄에도 풍년을 이루었음을 기뻐하였다. 이에 따라 1798년 4월에는 현륭원 남쪽에 만년제를 완성하였고 1799년에는 만석거보다 규모가 3배 정도 더 큰 축만제를 건설하였다. 이 수리시설로 서둔을 조성하고 각종 과학영농으로 둔전을 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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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호 소장
2016.07.07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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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읍치의 이전과 읍치에 거주하는 주민들에 대한 대책 등을 신속하고 적절하게 처리하기 위해 경기관찰사에 서유방, 수원부사에 조심태를 임명하였다. 정조는 화성을 조선의 제2의 도시로 조성하고자 여러 가지 행정적 조치를 취하였다.한편 상업을 부흥시키기 위한 조치가 취해졌는데 수원부사 조심태는 새 고을에 점포를 설치하는 일에 대하여 본고장 백성들 중 살림밑천이 있고 장사물정을 아는 사람을 골라 읍 부근에 자리 잡고 살게 하면서 이자 없는 돈 6만 냥을 빌려주자는 상업진흥책을 내놓았다.수원 사람에게 이자 없는 돈을 꿔주어 장사 밑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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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호 소장
2016.06.30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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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자 순조의 탄생 사도세자의 묘를 옮긴 직후인 1790년 묘자리 덕인지 아들 순조가 태어났다. 후계자의 탄생으로 정조에게는 그 동안 구상하고 있던 꿈을 실현할 계기가 마련되었다.그 꿈이 실현되기까지 정조의 심정을 알 수 있는 대목을 살펴보면, 아버지 장헌세자의 원침을 천봉한 후인 1792년(정조 16)에 정조는 대신과 각신들을 모아 놓고 자신의 본심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채 원통함을 삼키면서 30년을 하루처럼 지낸 사람이 있는가. ……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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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호 소장
2016.06.16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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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가 지목한 명당 수원을 찾아서1789년까지 수원의 중심지는 지금의 화성시 안녕동 지역이었다. 현재 우리가 통칭하는 수원의 구읍치(舊邑治)인 것이다. 구읍치는 화산(花山)을 주산(主山)으로 남쪽을 향해 자리잡았다. 화산을 등지고 관청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던 것이다.북쪽은 화산과 성황산이, 서남쪽은 도고산, 남쪽은 남산이 둘러싸고 동쪽이 터진 지형이다. 동쪽으로 황구지천이 막아서고 이 천을 지나면 바로 사방 팔방을 조망할 수 있는 요새지이며 수원의 산성 역할을 하는 독산산성이 우뚝 서 있다. 이 지역은 사람들이 살만한 양택풍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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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호 소장
2016.06.09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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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손을 위협하는 세력들나이 들어 판단력이 흐려진 영조를 끼고 권력을 유지하려는 홍인한과 정후겸 무리들을 한편으로, 세손을 둘러싸고 있는 궁료들로 지칭되는 홍국영(洪國榮), 정민시, 김종수 등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세력들 간에 정치적 갈등은 더욱 치열해져 갔다. 특히 홍인한, 정후겸, 화완옹주 등은 홍국영을 모두 배척 질시하였다.홍인한이 정후겸에게 왜 아첨하였을까. 이는 정치, 사회, 경제 등 모든 사안의 생사여탈권을 쥔 영조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정후겸에 대한 영조의 신임은 어디서 왔을까. 이는 영조와 화완옹주와의 관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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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호 소장
2016.06.02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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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궁 홍씨는 에서 사도세자가 정도를 벗어난 모든 행위의 근본 원인을 ‘광증’에서 찾았다. 생모 영빈 이씨 역시 ‘병’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사도세자의 대처분을 호소하였다.그렇다면 사도세자는 정말 미친 것일까. 사도세자가 미쳤는가에 대해 학계에서는 절대긍정과 절대부정의 두 견해로 갈리고 있다. 정조는 아버지가 미쳤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나 부인 혜경궁 홍씨는 ‘광증’이라고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혜경궁 홍씨의 은 풍산 홍씨의 집안일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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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호 소장
2016.05.26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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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시내 중심에서 고적의 향기를 뿜어내는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주제로 학위도 받고 시민들을 대상으로 여기저기서 강의도 하고 글도 많이 써왔다. 마흔이 넘어 늦깎이 학예직 공무원이 된 후 ‘화성’이 밥을 먹여준 셈이다. ‘화성’을 주제로 하는 박물관까지 만들고 관장까지 지냈으니 행운이었던 셈이다.그동안 5.7Km에 달하는 ‘화성’을 수백 번도 더 돌면서 ‘화성’ 건설의 배경과 과정, 그리고 특징에 대해 설명하고 글도 발표했다. 지금까지 발표한 글들은 논문의 틀을 벗어나지 못해 대중에 가까이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글들을 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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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호 소장
2016.05.12 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