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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원왕(재위기간 331년~371년)은 미천왕의 아들이며, 휘는 사유라 한다. 미천왕 15년에 태자로 책립됐다, 331년에 미천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고국원왕은 삶은 파란만장했다. 그는 외세와 맞서 싸워 고조선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한 투쟁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또한 새로운 시대를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해 평양을 개발하고, 남평양성을 개척함으로서 남방경략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북과 남에서 오는 적대세력의 침략에 대처해 여러 성들을 새로 쌓거나 보축했다. 334년에는 평양성을 증축했고, 335년에는 신성을 쌓았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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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8.08.07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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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년 국상 명림답부가 왕을 죽이고 정변을 일으킨 후 300년 국상 창조리의 정변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의 역사는 정변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정변이 자주 발생했다. 그런데 이러한 정변들은 국왕의 폭정에 대한 대중적 분노를 대변한 것들이 많아, 민심을 안정시키고 정치발전을 추동해 나라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컸다. 이 시기 고구려는 정변들을 거치면서 더욱 강성해졌으며, 겨레의 통합과 영토의 확장에도 크게 기여했다. 정변의 시대를 마무리한 것이 바로 국상 창조리의 정변이다.국상 창조리 봉상왕을 몰아내다 3세기 말 고구려에서는 봉상왕(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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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8.07.17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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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국과 대방국은 한사군에 속해 있던 낙랑군과 대방군과 다르다. 낙랑국, 대방국은 고조선 유민집단이 세운 독립 소국이며, 낙랑군 대방군은 한무제가 고조선의 옛땅의 일부을 차지한 후 그 지역에 설치한 한나라의 군현이다. 〈삼국사기〉에는 양자를 명백히 구분해서 기록해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랑군 재평양설을 추종하는 역사학자들이 양자의 구별을 애매모호하게 하거나 낙랑국, 대방국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아무런 구체적이고 과학적인 근거 없이 무시하는 태도는 올바른 역사학의 방법론이라 말할 수 없다. 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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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8.07.03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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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천왕, 좌가려 일당의 반란 진압하고 을파소 등용하다(191년)명림답부의 정변은 진보적 성격을 띠고 고구려의 성장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그 정변으로 명림답부가 속해 있었던 연나부의 세력이 매우 강해졌다. 정리하자면 태조대왕, 차대왕(수성), 신대왕(백고)은 모두 형제였다. 차대왕 즉위시기에는 관나부 환나부 비류나부 귀족들이 왕을 등에 업고 권력을 독차지했다면, 신대왕 즉위시기에는 연나부 귀족들이 정권의 중심을 차지하였는데, 그 중심에는 어비류와 좌가려가 있었다. 어비류, 좌가려의 자식들과 아우들은 아버지와 형의 권세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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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8.06.19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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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역사기록들을 비롯한 문헌기록들은 668년 고구려가 망한 후 외적들에 의해 무참히 소각, 약탈, 파괴되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런고로 고구려의 관직제도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동아시아에서 중세 초기 가장 발전된 선진강국을 누리었던 고구려의 역사자료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우리의 민족사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구려 전기 중앙 관직으로 대보, 좌보, 우보, 국상, 대신, 중외대부, 평자, 부장, 부마도위, 기실, 문하배 등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고구려에서는 최고위직 중앙관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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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8.06.05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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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던 왕은 누구인가? 흔히 장수왕(재위기간 413-491년)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보다 더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던 왕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태조대왕(재위기간 53-146년)이다. 태조대왕의 재위기간은 94년으로 장수왕의 79년보다 무려 17년이나 길다. 태조대왕은 94년 동안 왕위에 있다가 119살 되던 165년 3월에 사망했다. 이렇게 길게 왕위에 있다 보니, 그게 과연 사실일까 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경향마저 나타난다. 태조대왕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고, 재위 기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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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8.05.24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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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보면, 낙랑군과 낙랑국이 등장하는데, 얼핏 동일한 실체를 서로 다르게 이름붙인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낙랑군과 낙랑국은 엄연히 다르다. 낙랑군은 한 무제가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세운 중국 한나라의 군현이며, 낙랑국은 고조선 유민들이 세운 독자적인 소국이다.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견해가 확고하다. 그러다보니 낙랑국이 들어설 자리가 없으며, 〈삼국사기〉에 나오는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이야기를 비롯한 낙랑국의 역사는 한낱 설화로 치부되고 있다.평양의 낙랑국‘낙랑군 재(在) 평양설’은 역사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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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8.05.08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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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25년, 전한 왕실 출신 유수는 신나라 왕망을 몰아내고 한나라 왕조를 다시 세웠다. 이 왕조를 역사에서는 보통 후한이라고 부르는데, 220년까지 이어졌다. 후한세력은 전한에 이어 고구려에 대한 침략정책을 고수했다. 고구려와 후한세력의 전쟁은 28년, 49년, 105년, 111년, 118년, 121~122년, 146년, 168~169년, 172년에 일어났다. 후한 150여 년 간에 거의 10차례에 걸쳐 큰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고구려는 후한세력의 침략에 맞서 싸워, 이를 물리쳤을 뿐 아니라 고조선의 옛 땅을 하나하나 되찾아 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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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8.04.24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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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천자의 나라이다. 천자의 나라로서 나라의 자주권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고, 이를 고수했다. 평화롭게 발전해가던 고구려에게 닥친 첫 시련은 기원전 108년에 있었던 한 무제의 고조선 침공이다. 당시 한 무제는 고구려와 고조선을 같은 나라로 봤다. 당연히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고구려 땅에도 한사군을 설치하려 했다. 바야흐로 고구려에도 전운이 감돌고 생사존망의 위기가 닥쳐온 것이다.현도군 설치를 저지하기 위한 고구려 인민들의 투쟁한 무제가 고조선을 점령하면서 내친 김에 고구려까지 점령하려 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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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8.04.10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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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비에 따르면 “(주몽이 죽은 후) 세자 유류왕에게 유지를 내려 나라를 도리로서 잘 다스리도록 했고, 대주류왕은 나라의 기초를 잘 계승 발전시켰다”고 밝혀져 있다. 지금까지 추모왕(주몽)-유리명왕-대무신왕의 순으로 고구려의 왕계가 이어졌다고 알려졌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의 3대왕이 대무신왕으로 나오며, 대무신왕을 대해주류왕으로도 불렀다고 서술돼 있다.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대주류왕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대해주류왕과 동일인물이며, 따라서 대무신왕이 곧 대주류왕이라고 할 수 있다.〈삼국사기〉의 모순〈삼국사기〉에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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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8.03.27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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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어떤 나라인가를 알려면 먼저 건국자의 건국 사상과 이념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고구려의 건국자인 고주몽의 건국 사상과 이념이 체계적으로 정리돼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없어 그 전모를 밝히기 어렵다. 하지만 한 단면을 찾아 볼 수 있는 설화가 있으니, 〈동국이상국집〉(고려 이규보의 문집)의 ‘동명왕편 및 서문’에 실린 송양과의 만남 설화이다. 태양의 나라를 꿈꾼 주몽주몽과 송양의 만남 설화가 시사해주는 바는 크다. 이 설화는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꿈과 이상을 상징한다. 송양은 자신이 왕으로 되어야 할 이유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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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8.03.13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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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건국과정을 담은 건국설화는 다양한 판본이 존재한다. 지금 남아 있는 건국설화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것은 광개토왕릉 비문에 적혀 있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고구려 사람 자신이 써 놓은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특별하며, 역사적 가치가 높다. 1. 주몽! 그는 어떤 사람인가?기원전 15세기경 독자적 고대국가로 성장한 구려는 기원전 5세기를 전후로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걸었다. 국가 재정이 피폐해지고, 지방 소국들이 떨어져 나가고, 국가의 영역이 협소해져, 구려 5부지역만 남은 자그마한 나라로 전락했다. 그나마 구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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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8.02.27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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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고구려 본기와 연표에 의하면 고주몽이 왕위에 오른 것은 기원전 37년(갑신년)이다. 우리 역사학계 역시 고구려 건국 기원전 37년 설을 아무런 의심 없이 채택하고 있다. 그런데 단재 신채호 선생이 고구려의 건국 연대 문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이래 고구려의 건국 연대가 도마 위에 올랐다.〈삼국사기〉를 비롯한 역사서들에서도 기원전 37년 건국설과 모순되는 기술들이 다수 발견된다. 〈삼국사기〉권 22 고구려 본기 끝에 실린 사론에는 “고구려는 진나라 한나라 이후부터 중국의 동북쪽 모서리에 끼어 있었다”라고 기술돼 있다.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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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8.02.13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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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성장의 비밀은 구려에 있다. 고구려는 빈터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구려의 왕권과 영토를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건국자인 고주몽은 부여의 망명 정치세력의 대표자이다. 그는 망명한 지 2년 만에 고구려를 창건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가 구려왕의 사위가 돼, 구려 왕이 죽자 구려의 왕권을 물려받았다. 주몽은 구려의 왕을 물려받으면서, 구려라는 나라 이름에 ‘고’자를 붙여 고구려를 국호로 삼았다. 이때부터 구려라는 고대 국가는 사라지고, 고구려라는 새로운 나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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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8.01.30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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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고구려 역사여행을 출발한다. 고구려 역사여행을 출발하면서 우선 ‘고구려’라는 국명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구려라는 국호의 유래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동명성왕에 나오는데, 동명왕(주몽)이 나라를 세우면서 국호를 ‘고구려’라 정하고 ‘고’로써 성씨를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의 창건자는 주몽이다. 주몽은 구려왕의 사위가 돼, 구려왕위를 물려받아 왕이 됐다. 주몽은 왕권을 물려받은 후 구려라는 나라이름에 ‘고’자를 붙여 고구려라고 정했다. 이는 국호를 정할 때 구려라는 나라이름을 존중하고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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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8.01.16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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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 재(在)평양설은 일제 강점기 시대 이전에도 존재했다. 사대주의가 골수에 박힌 중세 우리나라 역사가들의 다수는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제반 역사자료와 고조선의 유적유물 분포 상황을 놓고 보면 낙랑군은 평양이 아닌 오늘날 요동지역에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평양에 설치됐다는 설이 확고한 정설처럼 고착된 것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 책동 때문이었다. 일제의 식민지 어용학자들은 낙랑군 재평양설의 물증을 찾았다고 떠벌였다. 그들이 구체적으로 제시한 물증이란 낙랑고분은 중국식(한식) 묘제라는 것이 첫째이며, 거기에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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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8.01.02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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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조선 고고학을 독점했던 일제어용사가들은 평양일대의 낙랑무덤을 마구 파헤치고 거기에서 드러난 자료를 갖고 마치도 한나라의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던 것처럼 꾸미고 그것을 기정사실화해 놓았다. 그들은 평양일대의 낙랑무덤은 중국의 한나라 시대의 무덤과 그 구조와 형식변천이 똑같으며, 낙랑무덤에서 나온 유물들도 중국 한나라의 유물과 똑같고, 그 대부분은 중국에서 만든 것을 가져 온 것이라는 것을 대전제로 삼고 낙랑군 재평양설을 꾸며냈다.일제 어용사가들은 낙랑무덤에서 몇 몇 중국산 칠기, 청동기가 나오고 중국 출신인물의 이름을 새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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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7.12.26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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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7일 한겨레신문 인터넷판에 이란 제목의 기사가 올라왔다. 지난달 초 전국 고고학 대회에서 고조선의 왕검성은 평양이라는 통설을 뒤집는 설이 새롭게 제기됐다는 기사였다. 제반 자료들을 종합할 때 왕검성은 평양이 아닌 요동에 존재했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그 연구자는 왕검성은 요동에 있다고 하면서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다는 모순된 주장을 했다. 오늘날 요동지역이 당시 고조선 땅이었다면, 낙랑군 역시 요동지역에 있어야 한다. 양자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놓여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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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7.12.19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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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나라 진개의 고조선 침공으로 2000리 영토를 빼앗겨, 요양하까지 밀렸다. 진 소왕이 죽은 후 연나라는 급속히 약화됐고, 고조선은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한 투쟁을 펼쳐 패수(대릉하)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패수를 경계로 삼은 후 약 200여 년 동안 중국(연, 진, 한)과 큰 전쟁은 없었다. 중국 한 무제는 고조선을 집어삼키려는 야욕으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고조선–한 전쟁 전야의 정세한나라는 건국 이후 복잡한 내외정세로 고조선을 침공할 엄두를 못 냈다. 그러다 기원전 180년에 한 문제 때에 이르러 나라의 정세가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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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7.12.05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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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은 동아시아 최초 고대 국가로서 찬란한 고대 문명을 창조했다. 고조선의 문화는 우리나라 민족 문화의 원류이다. 우리나라 민족문화는 고조선 문화를 원류로 형성돼, 삼국시대로 이어졌으며, 우리나라 중세 민족문화로 계승 발전됐다. 단군조선 시기 창조돼 후조선과 구려, 부여 진국 등 여러 고대국가로 이어졌던 우리나라 고대문화는 고유한 특징을 갖고 있다. 그것은 자주적이고 독창적인 문화, 높은 과학기술 수준을 자랑하는 문화, 우리 민족의 정서와 사상을 반영한 밝음 숭배문화이다.1. 자주적이고 독창적인 문화우리나라 고대 문화는 다른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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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7.11.21 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