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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는 고구려 왕조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고구려 영토를 먹어 삼키려던 야욕은 고구려 유민들의 격렬한 반당나라 투쟁으로 실패로 끝났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들은 민족을 배신하고 당나라에 가 붙었던 신라와도 대범하게 연대했다. 그 결과 고구려 백제의 땅뿐만 아니라 신라의 땅까지도 먹어 삼키려던 당나라는 고구려 신라 연합투쟁으로 우리 민족의 삶터를 장악 지배하려던 야욕은 물거품으로 끝나고, 쫓겨나고 말았다. 고구려 유민들은 항쟁의 초기에는 무너져버린 고구려 왕조를 복원하는 방향에서 투쟁을 펼쳤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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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9.08.14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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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옛땅을 차지하려 당나라의 흉계왕조의 종말은 곧 투쟁의 종말이 아니다. 고구려 왕조는 지배계급 내부의 분열로 당나라의 침략에 굴복하고 종말을 맞았다. 하지만 고구려 민중들은 당나라 침략자들에 맞서 영웅적인 투쟁을 이어나갔다. 그들은 고국을 되찾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온몸을 바쳐 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민중들이 당나라의 지배와 강점 야욕에 맞서 투쟁에 떨쳐 나선 것은 지배계급(왕실 귀족들)의 강요와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외세의 침략과 지배는 곧 자신들의 삶터와 자주적인 삶을 무참히 파괴한다는 것을 깨닫고, 삶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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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9.07.23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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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당 전쟁의 승리를 이끌었던 명장 연개소문이 666년 사망했다. 연개소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연개소문은 죽기 전에 세 아들에게 형제간 화목을 유언으로 남기고 죽었다. 하지만 권력욕에 눈이 어두운 귀족들의 농간과 이에 놀아난 세 아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어기고 서로 반목 대립하면서 권력을 놓고 이전투구를 벌였다. 큰 아들 남생이 지방순회를 하고 있을 때 동생 남건은 남생의 아들을 죽이고 왕명을 내려 남생을 평양으로 돌아오도록 명령을 내렸다. 남생은 평양으로 가면 죽을 것이라고 예단하고, 반역의 길로 들어서더니, 급기야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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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9.07.09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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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5년 고구려- 당 전쟁에서 참패한 당 태종은 분통이 터져 고구려를 다시 침략할 궁량만을 하고 있었다. 그는 병 치료 핑계로 태자에게 정사를 맡기고 고구려 재침공만을 꿈꾸었다. 그는 고구려 침략전쟁에서 당한 곤욕에 대해 신하 이정에게 “내가 천하 사람들을 가지고서도 조그마한 이족(고구려)에게 곤욕을 당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물었다. 이정은 발뺌을 하며 “그것은 이도종이 알 수 있다”고 대답했다. 태종의 질문에 이도종은 안시성 전투얘기를 했다. 그때 자신이 비어있는 평양성을 치면 이긴다고 제기했던 사실을 태종에게 상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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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9.05.10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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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침략군들은 백암성이 함락된 이후 곧바로 남쪽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쪽으로는 길이 험한데다가 고구려의 크고 견고한 성들이 여러 개 있고 고구려 지휘부에서 많은 군사를 보내 방어를 강화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당나라 군대는 다시 방향을 바꿔 요동성으로 해서 안시성, 건안성 쪽으로 나왔다. 이 때 당 태종은 안시성이 험준하고 그 군사가 용감하며, 그 성주 또한 재능 있는 용장이라 하니, 건안성을 먼저 치자고 제기했다. 그런데 이세적이 이를 반대했다. 그는 식량은 요동성에 있는데 서쪽으로 건안성을 친다면 고구려군이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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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9.04.17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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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고구려에 대한 침략 전쟁은 이미 620년대 말부터 계획됐다. 정권을 장악한 당 태종은 국내 질서가 안정되자 눈을 고구려에 돌렸다. 그는 수나라의 실패를 교훈 삼아 고구려 침공 준비를 매우 치밀하게 해나갔다. 644년에 태상경 위정을 궤운사로 임명해 하북지방의 절도(총지휘)권을 줘 군량을 유주로 운반토록 했다. 당 태종은 또한 소경 소예를 시켜 하남지방의 곡식을 산동 반도에 가까운 바다가운데 있는 ‘옛 대인성’(사마의가 238년 산동성 등주에 인접한 섬에 성을 쌓아 놓고 여기에 물자를 저장해 놓고 배로 요동지역으로 운반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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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9.04.02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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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수나라 300만 대군을 물리친 대규모 전쟁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다시 당태종이 도발한 새로운 침략전쟁에 휘말렸다. 618년 수나라가 망한 이후 중국 대륙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이연과 이세민 부자는 당나라를 세웠다. 당나라는 건국 직후에는 국내 질서를 안정시키고, 북방정세를 관리하느라 고구려에 대해서 유화적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10여년이 지나자 태도가 돌변해 고구려에 대한 침략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고구려 침략 야욕을 드러낸 당나라618년 중국대륙에서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섰다. 622년 당 고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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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9.03.19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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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년 7월 25일 살수싸움에서 대패했다는 통보를 받자마자 총퇴각 명령을 내리고 도망쳤던 수양제는 못내 분을 삭이지 못하고, 새로운 침략전쟁의 불길을 댕겼다. 당시 수나라 국내정세는 침략전쟁을 치를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수양제의 폭정을 반대하는 투쟁과 폭동들이 전국 각지에서 터져 나왔다. 산동지방에서는 왕박, 유패도, 두건덕, 손안조, 고사달 등이 폭동을 일으켜, ‘요동에 가서 헛되이 죽지 말라’는 노래인 ‘무향요동랑사가’를 퍼뜨리며 투쟁을 벌였고, 612~613년에는 북방의 백유사 등이 수십만 명의 폭동군 대오를 거느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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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9.02.26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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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성에 막혀 더 전진을 하지 못하자 조바심이 난 수양제는 특단의 대책을 새롭게 세웠다. 그것은 별동대를 꾸려 우회해서 곧바로 평양성을 공격하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수양제는 병력을 떼 내 9개 군단을 따로 편성해 요동성 쪽을 피해서 요동반도 남쪽으로 나가 수군무력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하도록 조치했다. 지금까지는 평양성을 아무런 의심 없이 오늘의 평양으로 봤다. 하지만 당시 전쟁지휘부는 수도 평양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부수도 북평양에 있었다. 부수도 북평양성은 처음 요동성(요사지리지에서는 요양성을 평양성이라고 써놓았다)에 설치됐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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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9.02.12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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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년 수양제는 300만 대군을 동원해 자기가 직접 참가한 고구려 2차 침공을 개시했다. 이 전쟁은 수나라의 네 차례에 걸친 고구려 침략전쟁 중에서 가장 격렬하고 치열하게 전개된 전쟁이었으며, 우리 민족의 역사상 가장 영웅적이고 빛나는 승리를 쟁취했던 전쟁이다. 이 전쟁의 승리로 우리 민족의 위대함을 널리 시위함으로서, 민족사를 뜨겁게 빛냈다. 그 전쟁의 갈피갈피를 여기에 상세히 기록한다.수양제의 침공준비수양제는 598년 1차 고구려 침공의 패배에서 심각한 교훈을 찾기는커녕, 패배의 수치를 씻는다면서 새로운 침략전쟁 준비에 미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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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9.01.22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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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사에서 영웅적 투쟁과 위대한 승리의 기록들은 수없이 많다. 그중에서 첫손을 꼽으라면 살수대첩으로 표상되는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이다. 여기에서 보여준 고구려 사람들의 영웅적 투쟁과 승리처럼 감동적인 드라마는 없다. 고구려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말타기와 활쏘기를 비롯한 무술을 익히고 단련했으며, 높은 민족적 긍지와 씩씩한 기상을 자랑했다. 고구려 사람들의 높은 민족자존심과 상무적 기풍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워 나라의 자주권을 튼튼히 지키고, 빼앗긴 겨레의 강토를 되찾아 강대한 나라로 만드는 원동력으로 되었다.6세기말~7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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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9.01.08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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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중엽에 조성된 새로운 정세는 고구려의 삼국통일 정책 수행에서 커다란 장애로 됐다. 백제는 성왕을 시해한 신라를 원수로 대했지만 고구려에 대한 적대적 태도 역시 포기하지 않았다. 신라는 한강유역을 차지한데 이어 동해안에서 멀리 북진함으로써 고구려에 매우 위협적인 세력으로 부상했다. 고구려는 이러한 불리한 정세에도 자기의 삼국통일 정책을 고수하면서 완강하게 투쟁을 벌였다. 6세기 중엽이후 고구려는 삼국통일을 완성하기 위해 598년, 607년 백제에 대한 공격을 포함해 8차에 걸쳐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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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8.12.18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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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년대 초 신라와 백제가 연합해 한강이북까지 밀고 올라옴으로써 고구려의 삼국통일정책 실현에 중대한 난관이 조성됐다. 하지만 고구려는 삼국통일정책 실현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완강하게 추진해 나갔다. 또한 동북방의 오락후국(대막로국의 서쪽에 있었던 부여계통의 족속), 대막로국(두막루국이라고도 함. 부여의 유민들이 니하를 건너가 세운 나라로 오늘의 흑룡강성 하얼빈시 부근에 있었다. 원래 346년 후부여가 망한 후 부여 사람들이 북쪽으로 니하를 건너가서 그곳에 있는 부여사람들과 함께 북부여를 건설했었는데, 두막루국은 이 북부여국의 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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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8.12.04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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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고구려의 치열한 각축전백제의 동성왕(재위기간 479~501년)은 집권 초기에는 국내 통치 질서를 회복하고, 경제와 군사에 힘을 쏟아 백제의 부흥을 이끌었다. 하지만 말년에 이르러 정사를 돌보지 않고 사치한 생활을 일삼고 사냥놀이에만 몰두했다. 동성왕은 불만을 품은 신하에 의해 501년 가을 살해당하고, 그의 아들 무녕왕이 왕위에 올랐다. 백제는 502년 11월 고구려의 영내로 침입해 들어갔다. 고구려는 백제의 국경침범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503년 9월에 일부 말갈인 부대를 보내 백제의 마수책(위치불명)을 불사르고 고목성(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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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8.11.20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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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공략을 위해 치밀하게 사전공작을 펼치다장수왕은 우리들에게 남하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특히 평양천도로 그러한 기억은 더욱 강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고구려의 남하정책은 장수왕 때 처음 채택되고 추진된 것이 아니라 멀리 고국원왕 때부터 구상된 정책이었으며, 광개토왕 때부터 본격화됐다. 장수왕 시대 전반기에는 평양천도 사업에 역량을 집중해야했기 때문에 실제로 남방경락에 나설 수 없었다. 평양천도 사업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440년대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백제 정벌 작전을 펼쳤다. 장수왕의 백제 정벌 작전은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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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8.11.0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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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413~491)은 광개토왕의 아들로 광개토왕이 죽은 413년 왕위에 올라 무려 78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백제의 수도를 함락시키는 등 삼국통일 정책을 정력적으로 추진한 왕이다. 그중에서도 장수왕의 제일의 업적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것이라 할 수 있다. 장수왕은 재위 15년(427년)에 기본 수도를 국내성으로부터 평양성으로 옮겼다. 이때 평양성은 247년 동천왕 때의 평양성도 아니고, 343년 고국원왕 때의 동황성도 아닌 새로 쌓은 안학궁과 대성산성이었다. 평양 천도는 삼국통일 정책(남하정책) 수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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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8.10.16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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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복잡한 국내외 정세에서 왕위에 오른 광개토왕은 자신의 통치 시기에 빛나는 위훈을 이룩했다. 남쪽으로는 백제를 쳐서 고구려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오늘의 경기도 동북부, 충청북도 북부와 동부지역을 고구려 영토로 확보했다. 동남으로는 소백산 줄기 계선까지 진출해 신라와 국경을 접하게 됐다. 또 동북쪽으로는 숙신을 쳐서 숙신족 거주지역 많은 부분을 속령으로 삼았다. 410년에는 조공을 거부하는 동부여를 국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가 항복을 받아내고, 속국으로 만들었다. 서북쪽으로는 비려부(거란족의 일부)를 쳐서 3개 부락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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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8.10.02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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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은 고구려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칭송받고 있다. 광개토왕릉비문에 따르면 “왕은 18살에 왕위에 올라 영락태왕이라 일렀는데, 은정과 혜택은 하늘에 가득 찼고 무공은 온 세상을 가득 덮었으며 (옳지 못한 자들을)없애치우고 생업을 편안케 하니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넉넉하고 오곡이 풍요롭게 무르익었다”고 칭송하고 있으며, 시호 또한 이 내용을 담아 ‘국강상광개토평안호태왕’ 즉 국토를 널리 넓히고, 나라를 평안하게 다스린 태왕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광개토왕 즉위 당시 내외정세는 매우 복잡다단했다. 서쪽으로는 후연 세력이 등장해 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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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8.09.18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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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원왕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소수림왕(재위기간 371~384년)이 왕위에 올랐다. 소수림왕은 고국원왕의 아들로서 고국원왕 25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371년 10월 부왕이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다. 당시 고구려는 고조선의 옛 땅을 전부 되찾고, 후부여의 옛 땅 대부분도 통합했다. 이로써 아시아 대륙의 동방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로 됐다. 당시 고구려의 영토는 대릉하 지역을 넘어 유주에 이르렀다. 덕흥리에 있는 유주자사 진의 벽화무덤이 이를 실증해주고 있다. 그 무덤에 있는 벽화그림에 따르면 고구려의 관료였던 유주자사 진은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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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8.09.04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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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원왕은 고조선의 옛 땅을 완전히 수복하는 역사적 대업을 완수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전연과의 전쟁(342년) 중에 일시적 전술적 실수로 환도성을 함락당하고, 태후와 왕비를 납치당했으며, 부왕의 시신을 강탈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또한 백제와의 전투중에 화살에 맞아 사망하는 비운의 왕이었다. 지난번에 이어 고구원왕의 파란만장한 삶의 기록을 더듬어 가본다. 전연을 멸망시키고, 고조선 옛 땅을 모두 되찾다고구려의 고국원왕은 전연과의 대결 태세를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태후를 되돌려 받기 위해 유연한 자세로 임했다. 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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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2018.08.21 1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