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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흥(全載興, 1927년생)은 국군 수복 후인 1950년 10월, 아무런 관련이 없었음에도 인민군 측에 의한 집단학살 사건인 서천등기소사건에 연루됐다며 서천경찰서로 연행됐다. 대전에서 열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대전형무소에서 갇혀 있던 중 1951년 3월 4일 총살당했고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 후 재심을 청구하여 62년만인 2012년 무죄가 선고됐다. 서천 시초면에서 태어나다전재흥은 1927년 2월 18일 충남 서천군 시초면 선동리에서 부친 전봉준과 모친 구덕환 사이에서 태어났다. 중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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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 소장
2016.09.19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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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영(李夏永, 1902년생)은 국군 수복 후 1950년 10월27일 고향인 성주에서 경찰에게 연행된 후 선남면 선원리 낙동강변에서 학살당했다. 당시 선남면에서 강변으로 끌려가 함께 희생된 주민들은 모두 48명이었지만 다른 곳에서 끌려온 희생자까지 합치면 전체 희생자 수는 200여 명에 이른다.둘째아들 이선근씨(1932년생)는 2013년 타계 직전 필자와 면담 녹취한 자료를 남겼다. 1960년 4.19혁명 당시 위령제를 둘러싼 군, 경찰의 방해 경험에 대한 증언은 지금도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이 노인은 군에 입대한 후 아버지의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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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 소장
2016.09.05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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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15일 5만의 미 해병대가 인천에서 상륙작전을 벌이던 때 낙동강 전선 모든 곳에서 적진을 뚫고 진격하라는 명령이 동시에 내려왔다. 이름도 무시무시한 ‘무제한 공격명령.’ 하지만 진격은커녕 더욱 거세진 인민군의 공격 앞에서 물러나야 하는 형편이었다. 인민군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또는 최후의 발악인 듯 보이는 공격을 퍼부었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해 봐야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면 전쟁은 승리로 끝날 것이라는 판단을 했을 수 있었고 실제 인천상륙작전을 벌임에 있어서 미군측이 가장 두려워했던 결과이기도 했다. 9월22일경 인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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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 소장
2016.08.22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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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의 저명한 항일운동가 어수갑(魚秀甲. 1896년생)은 국군 수복 후 학살을 피해 하성면에서 고양지역으로 왔으나 고양경찰서에 체포되어 1950년 10월 금정굴에서 학살당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은 여전히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 아직도 선생의 삶은 복원되지 않았으며 항일운동가로서 명예도 온전히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김포 하성면 명문가에서 태어나다어수갑은 1896년 김포 하성면 석탄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성룡(成龍), 호는 석강(石江), 본관은 함종(咸從)이었다. 힘 있는 가문에다 부유한 환경이었으므로 어린 시절부터 일찍이 향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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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 소장
2016.08.08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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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홍탁(1913년생)은 일제하 소작쟁의 등 농민들의 생존권 확보를 위한 투쟁에 적극 참여하다 1934년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3년 가까이 감옥살이를 당했다. 그는 체포 직전 일제 경찰에 들어가 강진경찰서에서 근무하던 중이었으므로 현역 경찰이 포함된 항일운동조직이었다며 당시 언론의 주목을 크게 받기도 했다. 전쟁 전까지 전국의 형무소를 전전했으며, 풀려난 뒤 집에 있던 중 한국전쟁이 나자 후퇴하던 경찰에 의해 예비검속 당해 1950년 7월16일 진도 갈매기섬에서 학살당했다.해남 산이면 중농의 집안에서 태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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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 소장
2016.07.25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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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전후시기 학살당한 인사들 중에는 항일혁명가들도 많았다. 이들은 일제의 학살과 가혹한 고문, 그리고 감옥살이를 겪고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이들을 다시 포고령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며 끌고 갔다. 학살을 피한 뒤 재판에 넘겨진 경우에는 형무소 재소자가 되었고 경찰서 단계에서 석방된 경우는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해야 했다. 이들은 전쟁이 벌어진 뒤 후퇴하는 국군과 경찰에 의해 체계적으로 학살당했으며 특히 형무소로 끌려간 인사들 중 살아남은 사례는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보은지역 국민보도연맹 사건이 벌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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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 소장
2016.07.12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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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열(朴世烈, 1913년생)의 삶과 죽음에 대한 문서 자료는 거의 없다. 70년이 되어가는 지금 그가 활동하던 시대의 사건들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대검찰청 에 실린 몇 개의 판결 요약문, 조갑순 할머니의 증언과 그의 남편이자 박세열과 같은 집안이었던 박세영 변호사의 판결문들에서 진실의 작은 파편들을 찾아 볼 수 있었다.임실읍 명문가에서 태어나다박세열은 1913년생으로 임실읍 성가리에서 부 박임조, 모 최수덕 사이에서 태어났다. 외아들이었다. 박임조는 동학농민운동과 관련이 있었다고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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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 소장
2016.07.04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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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식민지 조선에 살던 민중들은 해방을 어떻게 맞이했을까? 해방을 기뻐할 틈도 없이 하루가 지날수록 미군정의 독재가 강화되고 남북 분단이 기정사실로 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 시대의 혁명가들은 이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이현열(李鉉烈, 1912년생)은 해방 후 남원 건국준비위원회 산하 건국군 차장으로 활동하면서 김응조 전북경찰국장을 폭행했다며 6개월 징역형을 받았다. 석방 후 다시 양남식 살인사건과 관련되었다며 징역 15년을 선고받아 대전형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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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 소장
2016.06.20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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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당시 충무공호 등 7정을 이끌었던 임시 해군 진압책임자였던 소령 이상규(李相奎, 군번 80076)도 숙군의 마수를 피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해안인민군’ 사건이었다. 앞의 전호극 소령이 연루된 사건은 ‘해상의용군.’ 명칭은 달랐지만 이번에도 주모자는 병조장 이항표였다. 그것도 진해 해군 영창에 갇혀 있는 몸으로 조직사건을 일으켰던 것이었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사건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마산형무소에 갇혀있던 이 소령은 1950년 7월24일 마산육군헌병대에 끌려가 학살당했다. 소령의 생애, 사건의 전개과정에 대한 판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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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 소장
2016.06.06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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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한국전쟁 전과 후 숙청당한 군인들을 모두 남로당의 세포들이었다며 숙군을 합리화하는 주장을 소개했다. 이제 이들의 주장이 과연 옳은지, 군 수뇌부가 저지른 오류의 합리화 시도는 아닌지 숙청당한 군인들의 삶을 마산형무소사건 희생자 해군통신장교 전호극(全浩極, 1913년 추정) 소령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그에 대한 판결자료와 복무기록은 진실화해위원회가 아니라 딸 전씨가 해군 본부에서 직접 찾은 것임을 밝혀둔다.출생 성장전호극은 함경남도 북청군 신북청면 양천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전문환이고 모친의 이름은 확인되지 않는다. 현재 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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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 소장
2016.05.23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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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의 에 따르면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숙청당했던 국군의 수는 장교 242명, 사병 4133명으로 모두 4375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 8천명에 이른다는 주장까지 있는 것을 보면 이 수는 신원이 확인되는 최소치일 것으로 보인다. 숙군의 압력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군복을 벗었거나 ‘강표월북사건’ 경우처럼 탈영 또는 월북한 경우는 이 통계에서 빠졌을 것이다.이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던 숙군작업에 대해, 한국전쟁에서 생존하여 퇴역한 장성들이나 의 서술에는 공통된 입장이 있다. 숙군 없이 전쟁을 맞았을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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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 소장
2016.05.09 17:08